12월 ＯＯ일.

두 마음의 나를 보았습니다. 잿빛 안개에 싸인 거리 곳곳에서 문득문득 만나곤 하는 대상 없는 그리움, 슬며시 그 뒤를 따라 들어와 감당할 수 없게 하는 쓸쓸함. 그 둘은 타협 없이 맞서는 평행선처럼 보이지만 서로를 품어 안아 싹을 키우는 동조자임을 알았습니다. 한 가지에서 난 꽃송이처럼 함께 피어나고 함께 시드니 말입니다. 쓸쓸함의 싹을 자르고 희망을 품어 안은 그리움을 키워보고 싶은 생각 간절하지만, 휑뎅그렁한 마음의 뜨락만을 대책 없이 서성이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을 채운 한 권의 일기장을 깊은 곳에 간수 하듯 다시는 오지 않을 한 해를 접어야 하는 순간입니다.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곡 ‘december’가 흐르고 있습니다. 손가락은 건반 위를 바삐 움직이는데 음악이 되어 흐르는 소리는 왜 그리 공허할까요.

12월 ＯＯ일.

답사길에 나섰습니다. 퇴계의 학문을 능가했다는 고봉의 인품처럼 고매한 빙월당과 칠송정을 거쳐 백룡사 부도밭을 돌아보았습니다. 우거진 풀숲을 피하다 보니 매년 이즈음이 답사의 적기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겨울의 풍광은 유적지들과 어우러져 참으로 고즈넉합니다. 가는 곳마다 단 며칠씩만이라도 몸담아 머무르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예술가들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전라(全裸)의 인체에서 찾아내듯이 12월의 벌거벗은 산천은 맑은 거울 앞에 선 듯 진솔한 나를 만나게 합니다.

하루 해가 무척 짧다고 느껴지는 순간, 연로하신 어머니의 겨울나기를 생각해 보는 하루였습니다.

12월 ＯＯ일.

기세등등한 어두움의 장막 속으로 굴러드는 안쓰럽기 그지없는 빛을 봅니다. 동짓달 칼 바람 앞에 아무 준비도 없이 맨몸으로 서 있는 무능함이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시야에 드는 작은 소외마저도 손잡아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만 가득합니다.

종일을 하릴없이 빈둥거리고 나서 해 질 녘에야 부산을 떨었던 언제나와 같이 한해의 끄트머리에서 또다시 같은 행동의 되풀이입니다. 짧은 이 순간이나마 놓치지 않기 위해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마음의 방(榜)을 붙이는 일로 하루를 접습니다.

12월 ＯＯ일.

작년 이맘때쯤 집 마당 감나무 밑에 구르던 마른 잎이 똑같은 모양으로 구르고 있습니다. 달랑 하나 남은 속곳 차림으로 고개 숙인 달력 또한 작년과 같은 자리에서 떠날 날을 기다립니다. 삼백 육십여 번도 넘는 일출과 일몰 속에서 생과 사의 문턱을 어지간히 넘나들면서도 이렇게, 더 큰 이별 앞에 맞서리란 생각은 못 한 듯합니다.

삶과 죽음의 영속적인 숨바꼭질. 윤회라고도 하던가요. 한갓 덧없다고도 하지요. 슬픔도 기쁨도 유유히 흘러가는 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게 되는 공허와 쓸쓸함은 누구의 몫이 될까요.

초등학교 1학년인 조카의 일기장에도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버린 겨울은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