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된 송등전육씨 송덕비

송등전육 송덕비

나주배 과수원

일제시대 나주배 수확하고 있는 농민들

나주배의 역사는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 근대 이전 중세시대 특산품으로 보는 것과 개량종 배가 일본으로부터 도입돼 나주배로 명성을 얻게 된 두 관점 말이다. 나주에 배가 있었다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나주목’편 토공(土貢=貢物)조에 “죽순ㆍ대추ㆍ감ㆍ배[梨]ㆍ석류” 등이 있다고 나온다. 그렇지만 같은 책 ‘전주부’편 토의(土宜=지방에서 고유하게 나는 물건)조에 “뽕나무ㆍ삼[麻]ㆍ목화ㆍ감ㆍ배[梨]ㆍ왕대)” 등이 있다고 돼 있다. ‘남원도호부’편 토공(土貢)에도 “석류ㆍ대추ㆍ감ㆍ배[梨]ㆍ지초” 등이 있다고 경상도 ‘상주목’에도 배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배(梨)는 나주만의 특산품이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해볼 수있다. 1531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나주목 토산’조에는 아예 배가 기록돼 있지 않으며 인근 영암이나 광산(광주)의 토산에도 배가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1879년 간행된 ‘금성읍지-물산(物産)’조에 “…시 興龍洞, 조율(棗栗) 會津, 이(梨) 居平, 생강(生薑) 田旺, 청(菁) 榮山浦, 세포(細布) 草洞.…” 즉 거평(문평)에서만 배가 나온다고 기록돼 있다. 현대에 와서 나주배가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 1960년대 교과서에 전국 특산품으로 나주 배, 대구 능금, 소사 복숭아 등으로 실리면서 나주가 ‘배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나주배가 어떻게 명성을 얻었는 지 추적해보자.

●“세 조각 비석이 나왔어요” 굴착기사로부터 전화

1992년 여름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나주천변에 글씨가 새겨진 돌이 있는데 와서 봐 주세요” 급히 현장에 가보니 세 조각 검은돌이 흙을 뒤짚어 쓴 채 도로변에 놓여 있었다. 나주천 하수관거사업장에서 굴착작업을 하던 기사가 기계에 걸려 살펴보니 글자가 있는것 같아 건져 올려 놨다고 했다.

인근 집에서 물을 가져다 씻어보니 한자와 일본어(가타가나)가 새겨진 비석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략 살펴보니 배와 관련된 내용인 듯 싶었다. 그 날부터 이 비석에 대한 추적에 들어가고 마침내 비석이 나주에 배를 처음 들여온 일본인 송등(松藤. 마쓰후지)이라는 사람의 공적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귀인의 도움을 받아 1939년 작성된 송등 공적조서를 보게 됨으로써 그 비석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 할 수 있었다.

나주시 금천면 배박물관에 가면 뒤쪽 잔디밭에 세 조각으로 깨진 비석을 볼 수 있다. 그 비석이 바로 1992년에 찾아내 옮겨 놓은 그 비석이다. 나주천 현장에서 우선 향토문화회관으로 옮겨 놨으나 무관심으로 방치된 것을 보고 안 되겠다 싶어 1998년 나주배박물관으로 옮겨 놓게 됐다.



● 일제시대 나주에 비 식재한 송등전육씨 행적 공덕비

그 비 주인공인 송등(松藤)은 누구인가. 그가 바로 일본인 ‘송등전육(松藤傳六· 마쓰후지 덴노꾸)이다. 그에 대한 행적은 1939년에 작성된 ‘공적조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73년생으로 본적은 일본 장기현(長崎=나가사키) 남고목군(南高木郡)이며 나주군 금천면 원곡리 221번지에서 거주하다 1939년 2월 그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1904년 2월 조선으로 건너온 후 원주지에서 영농(과수원 운영)을 시작했으며 1907년 영산포 일본인회 평의원, 1914년 2월 나주학교조합회 의원, 1928년 4월 나주군 금천면 평의회원, 1933년 4월 나주군 과일조합장, 1935년 4월 나주 통조림 황도조합장을 역임했다. 그 공적에 대한 내용도 나오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4년 현해탄을 건너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거슬러 올라가 영산포 부근에 상륙해 지방사정을 시찰하고 영산강 연안 비옥한 황야에 주목, 나주군 금천면에 거주지를 정했다. 그곳의 기후풍토가 과수재배에 적합한 것을 통찰하고 배, 사과, 복숭아 등 묘목을 내지에서 이입해 재배에 착수. 당초에는 묘목의 고사(枯死), 병충해 등으로 효과를 올리지 못하고 몇 번 실패를 거듭했다. 연구 10년에 자금의 대부분을 시설과 연구에 쏟아 붓고 분발함으로써 근린의 동지를 격려하고 품종 개량과 재배법의 개선과 병충해 구제와 판로 확장에 노력, 금천면을 중심으로 한 나주군 과수집단지는 조선의 덴마크라고 칭해지는 이상향이 되었다 한다. 동업자가 증가함에 따라 생산업자 통제를 꾀할 필요를 통감하고 1933년 4월 나주 과수조합을 창립하고 초대조합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통조림용 황도에 관심을 갖고 일본 각 지방에 재배를 시도해 봤으나 기후 풍토가 적합하지 않고 품질이 떨어져 대항 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28년부터 나주 금천면에 시험 재배한 결과 생과의 본 고장이 캐나다 제품에 비해 손색없는 우량품을 생산하는 성과를 거뒀다. 1935년 10월 통조림용 황도조합을 조직하고 조합장에 취임했다. 묘목 분양과 재배면적 확대, 품종의 시점 개량에 전력을 경주하고 생산품 처리에는 죽중(竹中) 통조림 공장을 나주읍에 건설하고 수급계약을 체결해 순조로운 발전을 이뤘다’고 기록돼 있다.

● 파손된 비석, 금천면 배박물관 뒤편으로 옮겨

이러한 공로가 인정됐기에 1941년 2월 남차랑(南次郞) 조선총독의 글씨가 새겨진 송덕기념비 제막식이 있었음을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금의 금성동 구 경찰서 인근이라는 이야기만 전해온다. 이 비 파손된 일부분이 지금 보관돼 있는 것. 비 뒷면에는 그의 공적과 함께 시(詩)가 새겨져 있다. 일부 깨어져 없어진 부분이 있지만 확인된 부분만 그대로 옮겨 본다. ( )안은 번역문이다. ‘遙仰無等嶺 近臨榮山濱 (멀리 무등산이 보이고 가까이 영산강이 빛나네)/沃野且連亘 果木自繁茂 (기름진 평야는 연이어져 있고 과수는 무성해 졌네)/○○○○○ 地方好産業 (...... 지방의 좋은 산업이 되리)/氏ハ長崎縣嶋原ノ人 明治三十○ (씨는 장기현 도원 사람으로 명치 삼십 몇 년)/當地方ノ果樹ニ適スルヲ識○○ (당 지방이 과수에 적합함을 인식하고)/○河野石川等ノ諸氏ト俱ニ荒○ (하야 석천 등 제씨와 힘을 합하여 황무지를)’

비에 새겨진 석천(石川·이시까와)은 나중에 금천면 오강리 세류마을에, 하야(河野·가와노)는 송월동 시청 부근에 과수원을 조성한 것으로 파악된다. 송월동 출신 이동규(李棟奎. 전 나주시 농촌지도소장 이민관의 부친)씨가 가와노(河野)에게 묘목 지원과 기술을 배워 송월동에 과수원을 조성해 노력한 결과 1929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에서 개최한 조선박람회에 ‘조생적(早生赤)’이라는 배를 출품해 우수물산 경진회 동패(銅牌·3위)를 수상하기도 했다.

● 해방후 일제잔재 파괴…비석도 당시 깨어져 묻힌 듯

그러나 이 비는 1945년 해방 이후 자취를 감췄다. 1946년 4월20일자 ‘광주민보’의 ‘나주경찰서 주최로 왜적(倭賊) 유물을 매장(埋藏)’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해방된 삼천리강산에 아직도 왜적이 남아있고 우리 민족마저 없애려던 황국신민 서사주(皇國臣民誓詞柱)와 증오한 봉안전(奉安殿), 후손에게까지 전해질 적(敵)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으나 그 유물을 매장하자는 애국자들의 공론은 들은 적 없고 친외분자와 건국 범죄자들이 배격하던 경찰관의 손으로 매장하는 것을 보았다. 4월16일 오전11시 나주경찰서원을 선두로 각 관공서 단체와 정당 민주청년동맹 기타 유지 약 500여 명이 구 신사장(舊神社場)에 모여 단국 어천절의 기념 축하식을 나주경찰서 특무주임 황상기씨 사회로 거행한 다음 보기도 싫은 서사주(誓詞柱)로부터 시내에 산재한 왜인의 유물을 모조리 매장하고 오후4시 독립만세 삼창으로 폐회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군민들은 가문에 태극기를 높이 게양하고 경건(敬虔)의 뜻을 표하였다 한다.’

아마 송등(松藤)의 송덕비 또한 이 시기에 파손됐을 것이며 나주천에 버려져 징검다리나 빨랫돌로 이용돼 오다 45년 이상 흙속에 묻혀 있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나주천에서 그 돌을 보았고 건너 다녔다는 인근 고노(古老)들의 증언도 확인할 수 있었다.

● 조선박람회 출품…일본배보다 맛있어 국내외 명성

나주배의 명성은 1929년 조선박람회를 계기로 대내외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933년 12월 6일 ‘동아일보’의 “전남 나주(羅州) 배(梨)는 전 조선적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전 동양적으로 유명한 특산물로 근년에는 더욱 판로가 확장돼 조선 내는 물론 동경 대판과 멀리 만주 방면으로 수출이 증가돼 산품이 부족하여 조금 시기가 늦으면 수응키 어려운 처지라 한다.’

1939년 2월5일 ‘조선일보’의 “전남 나주지방에는 기후와 토질로 보아 과수재배에 최적지로 인정되여 벌써 삼십여 년 전부터 배, 복숭아, 포도 등을 재배하야 왔섯는데 그의 생산액은 근년 증가 일노를 밟어 최근에 이르러 연산액 삼십만원대를 돌파하고 잇스며, 금일에 이르러서는 나주라 하면 과물산지로 직각할 만큼 유명하게 되었다.’

1939년 11월8일 ‘조선일보’ “육일에는 전남 상공장려관에 나주 재등 과원(羅州齋藤果園)의 산물이라 하여 보기에도 탐나는 호박만한 배 오륙 개를 출품하여 비매품으로 ‘알콜’에 담가 보관하게 되었다. 배의 중량은 오백십이 몸메로 보통 시장에서 보는 큰 배가 일백 몸메 내외라 하며 그 주의는 일척육촌오분이고 고(高)가 오촌오분인 바 배 이름은 본래 금촌추(今村秋)라는 것이었으나 그 종자가 나주에 와서 맛도 달라지고 크게 되어 동경 천필옥(東京千疋屋)의 주인이 아리랑으로 명명한 것이라 한다.’

이 기사를 통해 ‘아리랑 배’가 일본 현지에서 만든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됐다. 1939년 11월10일 ‘동아일보’에도 같은 기사가 실린다. “이제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야기를 듣건데 동경 대판에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과실 도매상인 천필옥 주인이 작년에 나주배를 시찰하고 금촌추라는 나주배는 일본 내지 그것에 비하야 그 품질이 월등하오니 금촌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주배 실물에 대하여 욕된다고 하겠으니 독특한 명명이 필요하다고 하야 아리랑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송등(松藤)의 또다른 업적은 황도(黃桃)를 적극 권장하고 황도조합을 결성해 안정적인 생산과 공급을 주도함으로써 1934년 9월에 일본 굴지 죽중(竹中·다케나까) 통조림 공장을 죽림동에 유치하게 된다. 이 통조림 공장이 바로 화남산업 전신이다. 이 죽중 통조림 공장은 1939년 전쟁이 발발하자 쇠고기 통조림공장으로 변신해 군수품 조달에 앞장서게 되는데 소를 공장에서 직접 처리해 통조림 작업을 했던 관계로 희생된 소의 혼을 달래기 위한 축혼비(畜魂碑)가 지금도 그곳에 비스듬히 서 있다.

● 올가을 송등씨 행적 찾으로 일본 방문 예정

1996년 5월26일 39명의 일본인들이 나주시청과 금천면 일원을 방문한다. ‘재일본나주회(在日本羅州會)라는 단체로 일제강점기 나주에서 태어났거나 성장해 나주 심상소학교(현 나주여중)에 다녔던 일본인들의 모임이다. 인솔 단장은 송등정전(松藤正傳)씨였다. 그가 바로 송등전육(松藤傳六)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의 송덕비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비를 확인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필자도 5년전 일본 나가사끼 까지 가 송등의 행방을 추적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올 가을 다시 시간을 내 가 볼 계획이다. 나주배를 개척해 준 그 고마움을 그 가족들에게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