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된 역사가 흐르고 있다. 지난 12·3 계엄에서 탄핵까지 1945년 해방정국 혼돈을 닮았다. 오는 8월15일 해방 80주년이 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는 듯하다. 문명은 발전하는데 인간의 지적 성숙은 퇴보하고 있어서일까. 해방 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국민들은 김구 대신 이승만의 손을 들어줬다. 이승만 집권기에 조봉암과 신익희가 제거됐다.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로 쫓겨나자 박정희 군사독재자가 등장했다. 18년간 암흑기가 이어졌다. 선량한 사람들이 핍박으로 스러졌다. 박정희가 제거되자 느닷없이 전두환이 튀어 나왔다. 87년 6월 민주항쟁도 소용 없었다. 전두환 육사 동기 노태우가 청와대를 접수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왜 최선 보다 차악, 차악보다 최악의 후보만 선택할까.

1992년 김대중이 낙선하고 김영삼이 당선됐다. 후과는 참혹했다. IMF 직격탄을 맞았고 국격은 추락했다. 1997년 마침내 경제극복을 천명한 김대중이 당선됐다. 그러나 야당과 일부 언론은 변하지 않았다. ‘IMF 극복’에 대한 칭송 대신 깎아 내리기에 바빴다. 남북정상회담, 금강산 관광으로 통일 분위기를 띄워도 그들에게 김대중은 ‘빨갱이’일 뿐이었다. 쏟아지는 비판 기사는 고장난 레코드를 닮았다.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무렵이다. 60~70대 남자로부터 항의전화를 받았다. “이 신문은 정치도 못하는 빨갱이 김대중을 왜 맨날 좋은 쪽으로만 써주는거요” 당황했다. 어떤 말도 설득이 안됐다. 전문용어로 ‘마캥이’ 같았다. “좋은 정치도 많이 하는데 뭘 못한다는 거죠?.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도 하고 금강산 관광도 시작했는데 대단한 업적 아닌가요.” 그가 한마디 한다. “아, 김대중이 남북관계 그거 쪼까(겨우 조금) 한거 말고 뭐가 있소.” 그의 알량한 지식쪼가리에는 김대중의 업적이 그저 ‘그거 쪼까’로 치부되고 있었다. “얘기 그만 하시죠”라고 했더니 답변이 가관이었다. “알았소. 인자 당신네 신문 끊어버릴라요.”

최선은 보지 못하고 차악, 최악의 후보만 ?는 그는 어떤 심보였을까.

5년 내내 ‘모든 게 김대중 탓’을 외쳤음에도 노무현 후보가 깜짝 당선됐다. 모두가 환호했다. DJ정권 5년의 비난이 끝날 줄 알았다. 순진했다. 기득권 카르텔은 더 기승을 부렸다. 사시패스 한 노무현을 고졸 출신이라며 물어 뜯었다. 국가미래 청사진을 내놔도 ‘묻지마 무시’ 했다. 연일 비판만 쏟아내던 세뇌교육이 먹혔던 것일까. 이명박과 박근혜가 연이어 당선됐다. 우매한 국민들이 그들에게 안맞는 ‘대통령 옷’을 입혀준 셈이다. 두 전직은 대한민국을 70년대로 후퇴시켰다는 조롱을 받았다. 유권자들은 왜 최선보다 차악, 최악의 후보를 선택했을까.

박근혜 탄핵 뒤 문재인 대통령이 이어 받았다. 10여 년 시행착오 했으니 이젠 정말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자들이 없을 줄 알았다. 이 또한 오산이었다. 설상가상. 윤석열이 등장했다. 뭐든 잘 할 것처럼 호기 부렸다. 토론 중 “전쟁 나면 어떻게 할 건가.” 상대 후보 질문에 “먼저 미국에 전화하겠다”고 답했다. 그 때 호남인들은 알아봤다.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기엔 함량미달의 후보라는 것을. 비판여론에 고개라도 숙일 줄 알았다. 판단착오였다. 되레 80년 이후 사라진 구시대적 유물 ‘비상계엄’을 들고 나왔다. ‘처단’한다며 전국민을 공포에 몰아 넣었다.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간 시민들 덕택에 계엄령이 해제됐고 그는 탄핵으로 물러나게 됐다. 유권자들은 왜 최선의 후보 대신 최악의 후보를 선택하는 것일까.

88올림픽 당시 내무반에서 영화 ‘미션’을 시청했다. 정훈교육용 테이프였다. 심심풀이로 보겠다고 앉았다가 스펙터클 한 첫 장면에 압도됐다. 십자가에 묶인 한 남자가 강물에 떠내려온다. 깊은 물결속에 파묻히는가 싶더니 곧바로 천길 낭떠러지 폭포 아래로 고꾸라졌다. 이과수(악마의 목구멍 이라는 뜻) 폭포다. 영화 말미는 눈물과 감동을 보탰다. 스페인군에 다 죽고 겨우 살아 남은 5~7세 쯤 남녀아이 5명이 작은 악기 하나만 챙긴 채 쪽배를 타고 밀림 속으로 떠났다. 이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면서 과라니족의 생존을 이어갈 터다. 영화는 스페인군과 함께 했던 신부가 교황에게 임무완수 보고서를 읽으면서 마무리 된다. “…그들은 죽고 우리는 살아 남았습니다. 하지만 진정 산자들은 그들이고 죽은자는 우리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죽은 자의 영혼은 산자들의 마음 속에 살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신부의 내레이션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이틀후면 5·18 45주년이다. 옛 도청앞 광장, 금남로를 걷는 시민들 표정에는 웃음 대신 비장함이 엿보인다. 헛헛한 마음 달래보려고 광주 금남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들렀다. ‘소리없는 목소리’전이 열리는 중이다. 방문객들의 표정이 비장하다. 하지만 다 돌아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동호 어머니의 독백이 담긴 제6장 ‘꽃 핀 쪽으로’를 듣는 순간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다. 광주의 아픔은 진행형이다. 다행히 80년 주먹밥과 12·3 응원봉 열기가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해냈다. 정치권은 물론 국민 모두 오월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다시는 오월의 아픔은 없어야 한다. 최선이 아닌 최악의 후보를 뽑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산자들의 마음 속에 살아 남아 있는 죽은자들의 영혼’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