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메꽃의 발목이 투명하다. 그 발목은 인내하는 자세로 삭막한 모래언덕에 초록의 잎 마디마디 붙이며 한낮을 건너고 있다. 울음의 표정은 쉽게 자라나기에 꽃입술 꽉 깨물고 안간힘으로 뜨거운 모래밭을 기어가고 있다. 갯메꽃의 뒷모습이 처절하다. 여고 2학년 하굣길에서 동네 선배에게 유괴된 그녀의 시간처럼.

내가 지도하는 문학반에서 시 공부를 하고 있는 그녀는 유난히 보조개가 이뻐, 어린 시절부터 인기가 많았단다. 그날도 그녀는 학교 수업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한 선배가 회사에서 짤렸다며 울먹이는 소리로 길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딱 한 시간만 하소연을 들어 주기로 했다. 술에 취해 신세 타령하다가 울다 쓰러진 그를 자취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돌변해 그녀를 위협했다. 검은 복면을 쓴 어둠이 그녀를 윽박질렀다. 늪처럼 빠져드는 밤을 건너 집으로 가야 한다고 사정했지만, 어둠의 무법자에게 잡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창문 너머에 있는 달이 안타까워 달빛 무사를 내보냈지만, 그녀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렸다.

그날 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다른 지역으로 장소를 옮겨 감금된 날도 그 다음날도 한참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돌아가지 못했다. 그녀가 유괴당한 시간의 바깥에서는 비명처럼 봄날이 흩어졌고, 퀭한 눈빛의 겨울이 홀로 울다 사라졌다. 그녀의 울음은 벽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했는데 뱃속에 아기가 들어섰고, 어느 날 아기를 낳았다. 그녀는 갯메꽃 같은 아기를 꽃피우기 위해 내일이라는 잎을 틔우며 뜨거운 모래밭 같은 낮과 밤을 무릎이 닳도록 건너야 했다. 유괴라는 새장에 갇힌 그녀의 슬픔이 캄캄한 날갯짓으로 하루를 허비해도 자식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첫아이가 어느 정도 클 무렵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유괴된 지 7년째 되던 날, 두 아이를 데리고 그 남자와 함께 친정집에 갔다. 집은 발칵 뒤집혔고, 그 충격으로 친정 엄마는 몇 달 후에 돌아가셨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녀의 꿈이 친정 엄마를 죽음으로 내몬 것 같아 괴로웠다. 이후 그녀는 더이상 친정집에 갈 수 없었다. 그녀가 사는 삶의 바다는 소용돌이치는 오싹한 물살 같은 감시와 제약이 심해서 자유롭지 못했다. 서로의 체온을 나눌 수 없는 돛과 닻처럼 그 남자와 그녀 사이는 멀었다. 어둠침침한 해무와 자식들만 둘 사이를 이어 주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바다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암에 걸린 그 남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안하오’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녀는 자식들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 열심히 일했다. 증오심과 죄책감의 가시 돋친 물살이 그녀를 벼랑으로 내몰며 우적우적 갉아먹어도 자식이라는 갯메꽃을 꽃피우기 위해 범람하는 생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닷가의 갯메꽃이 저세상의 안부를 묻듯 분홍 입술을 연다. 돌아가신 친정 엄마의 슬픔이 누워 있는 바람 제단 앞에 향을 피우듯 꽃을 피우며, 손주들은 잘살고 있고 그녀도 시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으니 좋은 곳으로 가시라며 기도한다. 파도 소리는 철썩철썩 갯메꽃의 발등을 간지럽히고 있고, 꽃을 피운 여름의 안색은 평온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