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있는 등산로를 오르곤 한 것이 꽤 오랜 세월이다. 등산로라고는 하지만 가벼운 운동화로도 충분할 정도로 밭둑, 논둑을 따라 야트막한 숲속으로 난 정겨운 길이다.

길은 흔적이다.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말라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길이 아닌 곳을 용감하게 헤치고 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수많은 길이 만들어진다. 그중에서도 등산로는 산을 닮은 푸른 발길들이 모이고 모여서 생긴 자국들이다.

세월의 나이테를 온 마음에 얹어가기 시작하면서 그 흔적들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곤 한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끌림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편안하고 낯설지 않은 흔적을 만나면 삶의 원천이라도 찾은 양 감동하며 매료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인연이라고 하던가.

흔적도 인연도 영원하지는 않다. 지워지고 변형되고 남겨지기를 거듭하면서 세월과 함께 흐른다. 등산로에서 송 교장을 만난 것도 아마 동질적 흔적의 인연이지 싶다.

여름의 한가운데에 있는 요즈음 하산길에 마주치는 ‘송 교장’의 농막은 무성한 풀숲에 뒤덮여 한때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흔적이라고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조차 없다. 20여 년 전, 송 교장은 등산로 주변에 폐자재를 이용해 두어 평 정도의 움막을 손수 짓고 ‘송춘관(松春館)’이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농막은 물론이고 앞마당에 펼쳐진 채전(菜田) 역시 농산물 시험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계절에 상관없이 늘 푸릇푸릇 그림 같은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다 그의 유쾌하고 호탕한 말솜씨와 따뜻함이 가득한 미소는 그 누구라도 찾아들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송춘관’은 등산객들의 기분 좋은 모임터가 되었고, 송 교장은 늘 너털웃음과 함께 차와 막걸리를 내놓기도 하고 하산길에는 정성껏 기른 채소를 뽑아 배낭에 담아 보내기도 했다. 그가 학교에서 퇴직한 후 국유림인 등산로변에 자리를 잡은 것은 건강한 심신으로 찾아오는 사람들과 어울려 인생의 황혼을 뜻있게 보내고 싶어서라고 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등산을 할 때마다 등산로와 송 교장을 하나로 묶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송 교장이 영원히 그곳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믿었던 것은 함께한 세월이 준 습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어느 날인가부터 농막에 인기척이 없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가 반겨 주는 날도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목소리마저 푹 가라앉아 있기 일쑤였다. 그렇게 그렇게 불과 두어 해도 가기 전에 옛 시구처럼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곳 없네’를 쓸쓸한 마음으로 읊어야만 했다.

탄생이 더없는 축복의 순리이듯 노쇠와 소멸 역시 떨칠 수 없는 섭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 마냥 기쁘지만도 슬프지만도 않은 것이다. 아직은 푸르른 심신으로 등산로에 서 있는 나, 또한 더 푸른 모습으로 내 뒤를 따라올 그 누구…. 그래서 송 교장은 농막의 당호를 ‘송춘(松春)’이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