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앞에는 한 아름도 넘는 큰 포기의 수국이 아주 탐스럽게 자라고 있다. 그 싱싱한 푸르름과 등등한 기세는 3층인 우리집 창문에서 내려다보기만 해도 기분을 좋게 하여 내 마음까지 밝게 해 준다. 지난해에는 거기서 피어오른 꽃봉오리들이 어찌나 탐스럽고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지 볼 때마다 내 입이 벙그러지곤 했다. 그게 어디 나만이었겠는가. 보는 사람은 다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상하게 하나둘 꽃봉이 없어졌다. 며칠 후엔 나처럼 유심히 보지 않더라도 금방 알아볼 만큼 수국 꽃송이들이 없어진 자리가 휑하게 눈에 들어왔다. 너무 탐스럽고 예뻐서 남은 못 보게 하고 자기만 보겠다는 심산(心算)이었을까. 신비로울 만큼 하얗게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춰왔는데 몇 송이 꽃과 꽃대와 줄기만 남은 수국을 보니 벙글어지던 내 입에서 원망의 소리가 삐져나왔다. 나만이 아닐 그 속상함과 원망의 마음을 누군가 관리소에 하소연 했나보다.

어느 날 ‘수국 잘라가지 마세요’하는 플라스틱 표찰이 수국 옆 작은 소나무에 걸렸다. 그러나 잘려간 수국이 제자리로 돌아올 순 없다. 목이 잘린 수국 대를 보는 것이 마치 못 볼 것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고 그것이 잘리던 순간이 상상되어 섬뜩해지기까지 했다. 그걸 잘라간 사람은 그걸로 얼마나 자신만의 행복을 맛보았을까. 하지만 남과 함께 나눌 수 있는 행복을 자기만 독차지하면 그 행복의 크기가 작아지고 향기도 없어진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또 원래의 자리에 있을 때 보여지던 아름다움이 그 자리를 떠나면 멋도 향도 반감되어 온전히 느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까.

수국은 토양에 따라 여러 가지 색으로 피고 진단다. 난 사실 수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탐스러운 꽃송이가 부담스러웠고 무엇보다 꽃말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것은 하얀 수국인데 꽃말이 변덕, 변심이다. 수국은 보통 하얗게 피거나 초록색이다가 분홍이나 하늘색으로 변하는데 그게 아마 변덕이나 변심이란 꽃말을 갖게 하지 않았나 싶다. 자주 빨강 파랑 백색의 탐스럽고 풍만한 수국꽃들을 보고만 있어도 가슴까지 충만해지는데 꽃말이 노랑은 짝사랑, 파란꽃은 거만이고 보라는 진심, 분홍은 진실된 사랑이라니 꽃말도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봄이 왔나 싶더니 여름이 가고 가을로 접어들었으니 우리 집 앞도 이제 곧 수국의 달이 될 것이다. 다른 곳의 수국은 이미 다 피었겠지만 우리 집 수국은 가을 녘에 피는 터라 이제 곧 필 것이다. 수국을 꺾어갔던 지난해의 그 사람도 올해는 제발 우리와 함께 함께 오래 두고 보았음싶다. ‘수국 잘라가지 마세요’ 팻말도 그가 떼어내게끔 금년엔 마음을 바꿔 주었으면 싶다.

누군가 들꽃을 꺾으려 했던가 보다. 마침 그걸 본 동네 어르신이 ‘그 꽃은 거기 그대로 있을 때가 제일 예쁘다오. 그러니 그냥 놔두시오.’ 했단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그냥 있을 때가 가장 예쁜 것인데 왜 그걸 자기만 보겠다고 꺾으려 할까. 결코 꺾어간 그 꽃을 화병에 꽂아도 원래의 자리에 있을 때만큼은 예쁘지 않을 것이고 또 금방 시들어버렸을 것이다. 제발 금년에는 지난해처럼 자기만 보겠다고 꽃을 꺾어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분명 그에게도 꽃을 꺾을 때 덜덜 떨던 수국의 두려움이 느껴졌을 것이다. 꺾을 때 아프다고 소리치는 그 소리도 들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순간적 욕심이 손을 멈추게는 못 했던 것 같다.

싱싱하게 펼쳐진 수국의 줄기와 잎을 본다. 보세요. 내가 피워낼 아름다운 꽃을요. 그가 한껏 으스대며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벌써부터 환하게 웃으면서 피어날 수국들이 눈앞으로 왔다 갔다 한다. 마치 지난해 몽골 하늘에서 빛나던 그 커다란 별들처럼. 그런데도 팻말로 눈이 자꾸 간다. ‘수국 잘라가지 마세요’ 글자 하나하나가 내 기도라도 된 듯 수국꽃 별이 되어 깜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