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유효기간이 끝나 새 여권을 발급받았다. 그런데 여권을 받아 드는 마음이 참 착잡해졌다. 문득 이 여권이 내게는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신청서를 쓸 때도 약간의 그런 심란한 갈등이 있었다. 5년으로 할까 10년으로 할까. 그러다가 10년으로 했다. 10년이면 2034년이다. 그때까지 내가 살 수 있을까. 아니 산다고 해도 여행을 하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때도 이게 내 생애의 마지막 여권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신청서를 냈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새 여권을 받고 보니 그 생각이 더 확실해지는 것 같다. 그러면서 씁쓸해지는 느낌에 마음이 그리 좋지는 않다. 아마도 곧 운전면허증도 갱신을 해야할텐데 그것도 나이 들었다며 많이 까다롭다고 한다. 가능하면 운전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자율주행으로 운전자가 할 일은 없어져가는 데도 운전을 안 해도 될 운전자에게 제한을 가하는 이유는 뭘까. 발전과 변화는 빠른데 제도는 한참 뒤에서 따라오고 있으니 이것도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을 위해 만들어지는 제도가 아니라 제도에 맞춰 사람이 가지 말고 서 있으라는 말인가. 은행에 가면 더 실감한다. 요즘 65세는 청년인데도 인지능력이 떨어져서 판단이 정확지 못할 수 있다면서 멀쩡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인지능력저하자로 만들어 참 불편하게 하고 있다. 내 것 갖고도 내 맘대로 못하게 하는 세상이라 이래 저래 늙으면 서글플 뿐이다. 늙어가는 것은 익어가는 것이란 말은 정말 듣기만 좋은 말이다.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면서도 분명 여권 갱신 같은 마음이 또 들 것 같은데 그때도 마지막 갱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

사실 이 마지막이라는 말은 희망적인 좋은 뜻으로도 사용된다. 이를테면 삼세번처럼 완전히 포기해야 할 어떤 상황에서도 한 번만 더 해 보자는 희망과 기대의 시도를 할 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 보겠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어떤 사고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마지막 기회를 한 번만 더 줘보자고 한다. 어떻든 마지막이라는 말은 한계를 결정짓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마지막이란 말에선 죽음 냄새도 날 수밖에 없다. 생명만이 아니라 일의 끝장 그리고 포기,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뜻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스럽고 가능한 함부로 내뱉지 않으려는 말이다.

새 여권을 펼쳐본다. 얼마 전까지 쓰던 여권과는 달라진 게 많다. 색깔도 녹색이었던 것이 청곤색으로 바뀌었고 표지 디자인도 달라졌고 내면의 여권에도 전자칩이 내장되었다고 한다. 세상은 이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변화의 급 물살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냥 휩쓸린 채 어딘지도 모를 곳에 내동댕이쳐질 수밖에 없다. 언젠가 타고가던 기차에서 ‘이 열차의 다음 역은 마지막 종착역입니다.’ 하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당연히 내려 다른 기차로 갈아타고 갈 거였다. 그런데도 마지막이란 말에 순간 묘한 불안과 절망의 숨 막힘이 느껴지던 기억이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이란 말은 어떻든 참 조심스러운 말 같다. 마지막 기차가 떠나가 버린 간이역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암담한 발걸음을 떼지도 내딛지도 못하는 마음이라면 어떨까. 거기 눈이라도 내리거나 비라도 내린다면 더 을씨년스러울 것이며 외롭게 켜진 외등마저 비나 눈으로 더 희미해져 있다면 더욱 서글퍼질 것이다.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를 키워준 외할머니도 이모도 가시는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이 되는 순간을 인간은 모른다. 자신도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 그렇다면 마지막이란 당사자에겐 더욱 황당한 말이다. 내일 꼭 보자고 해놓고도 영영 못 보는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 없으면서도 있는 것 아닌가. 미리 짐작으로 끝을 단정하거나 선언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 맞다. 10년이라는 한도는 희망사항도 예측도 아니고 그저 편의상 만들어진 제도 속의 적용 기간일 뿐이다. 누가 아는가. 10년 후에 10년짜리 여권을 다시 만들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