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연히 눈에 들어온 ‘제프리 초오서’의 운문 설화집 ‘캔터베리 이야기’. 중세 영국의 최대 시인이며 ‘영국시의 아버지’라고 칭하는 초오서는 현실과 인간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주어 셰익스피어 문학의 출발점을 이루게 한 작가로도 유명하다.

대가족 속에서 어린 날을 보낸 나는 자연의 섭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초자연적인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들으면서 자랐다. 더구나 우리 집 사랑방은 사람이 끊이지 않고 늘 북적거렸으며 이야기꽃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웃음과 해학이 있고, 인간적인 삶이 가득한 ‘캔터베리 이야기’를 읽는 동안 어린 날의 사랑방에라도 앉아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캔터베리 대성당을 참배하러 떠나는 순례자들을 이야기꾼으로 등장시켜 24편으로 묶어놓은 ‘캔터베리 이야기’는 국왕과 거지를 제외한 모든 직업의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았을까 싶다. 기사, 방앗간 주인, 농장책임자, 요리사, 법률가, 수도사, 관리, 신학생, 향사(鄕士), 의사, 면죄부 장사치, 여수도원장, 탁발수도사, 신부, 상인, 선장 등등이 돌아가면서 온갖 사연들을 자신의 개성과 수사법에 맞게 끊임없이 펼쳐낸다. 숭고한 이야기, 악의적인 이야기, 교훈이 되는 이야기, 음담패설, 설교에 이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템스강 남쪽 서더크의 타바드 여관에서 시작해 캔터베리 성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진다. 순례자들 각각의 행색이나 성격의 실감 나는 묘사는 물론 걸쭉하게 뱉어내는 대사들은 우리의 판소리 여섯 마당뿐만 아니라 12마당을 모두 찾아 듣고 난 것 같은 후련함과 친숙함이 느껴진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초오서가 1387년경에 시작하여 1400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 썼으나 미완으로 남은 작품이다. 처음 의도는 120편의 대작이었으나 24편에 그치고 말았다. 신(神)에서 인간 중심으로, 내세에서 현세로, 전체에서 개인으로 옮겨가는 르네상스 문학 특징이 그야말로 잘 드러난 작품이다. 분명 성지를 찾아 나선 순례길이건만 신은 보이지 않고 인간 개개인의 삶과 다양성을 표출하려 애를 쓴 작가의 시대적 사명감이 깊이 들여다보인다.

어딘가로부터 이 세상에 와서 살아가다가 또 어딘가를 향해 떠나야 하는 우리 인간은 그야말로 큰 집단의 순례객들이다. 가족, 친구, 이웃들 모두는 그 순례 여행의 길동무들이라고나 할까. 그들은 캔터베리 이야기의 순례객들만큼이나 다양해서 각기 다른 개성으로 각기 다른 사건들을 몰고 와 끊임없이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우리는 싫든 좋든 동반자라는 사명감으로 그 모든 것을 보듬어 안으면서 순례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가끔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지치고 의욕이 사라져 주변인으로 물러앉고 싶을 때마다 ‘캔터베리 이야기’의 순례객들을 따라나서고 싶은 꿈을 자주 꾼다. 가장 나다운 몸짓과 마음가짐으로 낯모른 산모퉁이를 타박타박 걸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