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옷을 입은 전신으로도 비바람이 마구 몰아쳤다. 이러다 못 보면 어쩌지 하는 불안으로 가슴이 마냥 콩닥댔다. 백두산 북파 코스로 오르는 길이다. 한데 내 급한 마음만큼 걸음을 빨리할 수도 없게 마구 부딪치는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초조해지는 발걸음 가득 자꾸만 하늘만 쳐다봐 졌다. 바람은 부는가. 바람만 불어줘도 안개가 걷힌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비가 내리고 안개가 드리웠어도 바람이 그걸 풀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기대 반 불안 반은 어느새 간절한 기도가 되어 있었다. 제발 이 간절함이 하늘에도 닿아 천지(天池)를 열어주었으면 싶었다. 얼마나 어렵게 오게 된 길인가. 그리고 언제 다시 올 수나 있겠는가. 드디어 천지가 있는 2,620미터의 해발 표시가 있는 천문봉 정상에 이르렀다.

두 개의 코스 중 천지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다는 안내자의 조언에 따라 B코스를 택했다. 한데 모두 우리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쪽으로만 몰리는 인파가 더 컸다. 하지만 더 문제는 내가 천지를 조망할 만한 곳이 아무리 찾아도 들어갈 틈조차 없다는 것이다. 시간만 흘렀다. 한데 하나둘 슬금슬금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생긴다. 기다림에 지쳐서인지 천지를 볼 가망이 없다고 체념한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7월 하순인데도 내리는 비와 세찬 바람에 한기가 돌만큼 추워서인지 어떻든 빠져나오는 그 틈새를 노려 잽싸게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천지가 열리면 볼 수 있을만한 조망권을 겨우 확보했다. 하지만 예측도 기대도 할 수 없는 오로지 하늘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무작정 기다린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딱 맞는 말이었다. 짙은 안개는 여전히 지척도 분간할 수 없게 한다.

갑자기 ‘와’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시에 터져 나왔다. 깜짝 놀라 천지를 바라보니 바람이 안개를 흩어놓는 그 사이로 어렴풋이 천지의 벽면이 형체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하얀 안개의 바다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대로 자리를 지켜내며 변화를 기다렸다. 믿음인지 기다림인지 모두의 눈길은 하나같이 천지의 물이 보여지기만을 간절히 절절히 한마음이 되어 기다렸다.

다시 아까보다도 더 크게 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화답이라도 하며 커튼이 걷히듯 아주 우아하게 천지가 안개 옷을 벗으며 푸른 물의 얼굴을 고즈넉이 내밀었다. 그의 파아란 얼굴이 안개 속에서 더욱 신비로워 보였다.

어느새 비도 개어 있었다. 하지만 내 온몸은 천지를 만난 감격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둘레 13.8㎞, 지름 4.6㎞의 천지는 장군봉 백운봉 천문봉이 에워싸고 있는데 지금 우리는 가장 적게 보이는 쪽에서 보고 있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예로부터 3대의 공덕을 쌓아야 천지 물을 볼 수 있다고도 했고 몇 번을 왔어도 못 본 사람이 많다는데 오늘 나는 단 한 번에 이렇게 천지와 조우한 것이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

열린 천지를 바라본다. 비록 우리나라 쪽에서 바라보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은 있지만 천지는 분명 우리 천지가 아닌가. 지금도 백두산 아닌 장백산에서 보고 있고 천지도 일부가 중국으로 넘어갔다지만 분명 천지는 ‘나는 당신 편이에요’ 말하고 있었다. 그런 사연 속 그의 안쓰러운 마음까지도 전해져 와 내 몸과 마음이 같이 젖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천지에서 세 번이나 젖는다. 비에 흥건히 젖고, 천지를 보는 감격에 젖고, 민족의 아픔을 함께하는 동병상련하는 아픔으로도 젖는다. 그러고 보니 젖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인가보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가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비로 감동으로 감격으로 아픔으로까지 젖는 천지와의 해우는 내 삶 속에 또 하나 아름다운 사건의 기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 같다. 나는 천지에서 세 번이나 온몸이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