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음식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네 삶의 이야기다. 지난달 28일 오후 7시 30분 연극 파인다이닝이 열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1을 찾았다. 파인다이닝은 ACC 아시아 콘텐츠 공연개발사업에 선정된 김미란 연출의 작품이다.

ACC는 지난해 현대인의 관계·욕망·기억 등 다층적인 사회문화현상과 시대적 징후를 읽을 수 있는 장소이자 상징인 ‘식탁과 기억’을 주제로 사업공모를 진행했다.

김 연출은 ‘식탁과 기억’을 자신의 아버지인 김영학씨에게서 찾았다. 김영학씨는 한때 잘나가던 경양식 요리사였다. 김 연출은 아버지가 겪어온 경양식 황금기와 침체기를 통해 노동의 고뇌를 풀어냈다.

무대 위 화려하고 우아한 빛을 내뿜는 샹들리에가 무대를 비춘다. 어릴 적 찾았던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봤을 법한 조명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 속 경양식 레스토랑 공간으로 온 기분이 들어 반갑다. 무대 한 켠에는 딸 미란 역을 맡은 하지은 배우가 보인다. 무채색 정장을 입은 미란은 화려했던 경양식 요리사로 명성을 쌓던 아버지 김영학씨의 기억을 떠올린다. 마치 시간여행을 주도하는 사회자와 같은 느낌이 든다.

경양식 돈가스를 줄여서 ‘경돈’ 역을 맡은 이승현 배우는 돈가스의 황금기 시절 함께 했던 김영학과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지글 지글 기름 튀기는 사운드와 함께 경돈을 비추는 노란 조명은 후라이 팬에서 돈까스를 튀겨내는 기름 같다. 사운드와 조명에 맞춰 이승현 배우는 갓 튀겨낸 돈가스를 연기한다. 마치 생생하게 튀겨지는 돈가스를 보는 듯해 흥미롭다.

시골에서 상경한 김영학은 근면성실함이 무기다. 레스토랑에 취직하고 접시 담당을 지칭하는 아라이부터 샐러드, 세컨 그리고 최고 탑인 주방장 자리까지 단숨에 올랐다. 명성을 얻게되며 호텔 주방장의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적은 임금과 처우에 제안을 거절하고 장미빛 인생을 꿈꾸며 경양식 레스토랑을 열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의 무게와 자신만의 가게를 갖고 싶은 마음도 복합됐다. 경제위기와 우후 죽순 생겨나는 프렌차이즈 레스토랑과 음식 트랜드 변화로 경양식 레스토랑은 흥행하지 못했다. 변화에 맞춰 닭 갈비 등 가게로 업정을 변경하면서도 본인만의 레시피로 만든 돈가스 만큼은 메뉴에서 빠지지 않았다. 요리사의 삶을 지켜내고자 한 영학이지만 결국 좋아하는 일을 멈추고 택시기사 일을 한다. 바쁜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반려 견을 돌보며 외롭게 소주를 마시는 김영학의 모습에서 가장의 무게가 보인다. 이 장면은 영학에게도 한 때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여실히 느끼게 해준다.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던 씬은 ‘Entree 일’ 이다. 둥근 무대 위를 햄스터가 쳇바퀴를 돌듯 뱅글 뱅글 도는 김영학. 무대 한가운데서 제자리 뛰기를 하는 딸 미란. 미란은 외친다 “나는 무엇을 위해 달리는가. 늘 쉬지도 못하고 최선을 다하는데 왜 항상 제자리인가.”

수 십 년간 가족들이 먹을 것을 챙기며 가사노동을 해온 어머니는 그간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저 아내이자 어머니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치부됐다. 어머니에게도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가족을 위해 접은 꿈에 대한 미련 속 피어난 서운한 감정들은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났다면 한 번쯤 해봤을 법한 고뇌를 전한다. 직장에 다니다 비로소 하고 싶은 배우의 꿈을 이뤄내기 위해 다시 예술대학을 가고 연기를 하며 꿈을 쫓는 딸 미란. 하고싶은 일을 하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쌓아왔지만 달라질 것이 없다. 그자리 그대로 제자리다. 앞으로 나아갈 듯하며 제자리걸음을 하며 외치는 배우의 절규어린 독백을 통해 헛헛함과 노동의 의미는 뭘까. 정말 잘 살고 있는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 장면을 본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김영학도 고뇌가 있었다. 김영학에게 노동은 돈가스다. 그의 열정과 꿈이 불안감이 모두 담겼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이 아닌 오로지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고 있는 김 영학은 이제 노후에 대한 불안까지 겹친다.

공연 말미 딸 미란은 말한다. “오랜만에 아빠가 만들어주는 돈가스를 먹고 싶어. 아마 조만간 해주게 될 거 같은데…”

무대 외부 문이 개방되고, 돈가스를 담은 음식 카트와 함께 연극의 실제 주인공인 김영학 씨가 등장한다. 흰 천을 두른 식탁 위에 돈가스를 올리고 극중 김영학과 실제 김영학이 마주 보고 돈가스를 먹는다. 김영학의 ‘돈가스’는 누군가의 꿈이었고, 희망이었으며 한 가족의 생계수단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연극이 끝나고 관객들에게도 돈가스를 맛볼 기회가 주어졌다. 로비에 경양 식당 ‘니벨롱겐’의 모습을 재연한 듯 한 식당에서 맞본 돈가스는 가슴 한 구석을 따사롭게 했고, 쉬지 못하고 달려온 지친 삶 속에서 잠깐의 쉼과 다시 살아갈 힘을 줬다.

이나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