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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의 뮤직줌 <121>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형식적 실험+감정적 호소력…오케스트라 레퍼토리 필수작품
미망인 폰 메크와 14년간 교류
제자 밀류코바와 결혼 후 파경
해외 도피후 안정…명작 완성

2025. 04.03. 16:37:47

차이콥스키

우리는 수많은 만남 가운데 인연을 맺으며 살아간다. 이러한 관계 가운데 이웃이나 친구가 되기도 하고 남남이 되기도, 때로는 부부의 연을 맺기도 한다. 우리 속담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에서 만남은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관계를 통해 만남은 최고의 순간을 보내기도 하고 최악의 순간을 맞기도 한다. 하지만 최악일 것 같은 삶 속에도 기회는 있는 법이며 그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지기도 한다.



● 미망인 폰 메크·제자 밀류코바와 두 인연

1876년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1893)가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활동하던 시절 러시아 철도 미망인 폰 메크 여사(Nadezhda Filaretovna von Meck·1831~1894)와 인연이 시작됐다. 폰 메크 여사 남편은 러시아 최초로 철도를 건설하며 부호로 활동했지만 갑작스럽게 사망해 그녀는 홀로 6남6녀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그녀는 좋아하던 작곡가 차이콥스키를 위해 매년 6,000루블씩 지원을 시작했다. 단 이들은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들은 14년간 1,200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직접 만나지는 않고 차이콥스키 음악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14년간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동성애자였던 차이콥스키는 당시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 이를 철저히 은폐하고자 1877년 자기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Milyukova·1848~1917)의 적극적인 구애에 결혼을 한다. 하지만 이 결혼은 채 한 달도 안 돼 깨지고 말았다. 차이콥스키는 정신적 충격으로 모스크바강에 투신하며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어려운 시기 잠시 해외로 도피한 차이콥스키는 정신적 안정을 찾은 후 폰 메크와 교류로 영감을 얻어 교향곡 4번과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완성할 수 있었다.

차이콥스키와 안토니나 밀류코바
●‘운명 교향곡’ 별명 얻은 교향곡 4번

1877~1888년 사이 완성된 교향곡 4번의 표제는 없지만 음악적 동기가 베토벤 교향곡 5번과 흡사한 팡파르 리듬을 갖고 있어서 ‘운명’ 교향곡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차이콥스키는 작품의 음악적 구조에 대해 중요한 언급을 한다. 1878년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에게 보낸 편지에 아래와 같이 말했다. ‘1악장 오프닝 팡파르는 운명을 의미하고 있다. 그 오프닝은 교향곡 전체의 중심이자 핵심적인 요소로 전체 교향곡의 중요한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마치 행복을 방해하는 치명적인 영향력과 같이 인간은 운명에 복종하고 한탄하는 것 외 할 수 있는 게 없다. 모든 삶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꿈과 행복의 목표와 함께 고단한 현실의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의 1악장 시작부분
●감정적 긴박감·멜로디 유려한 흐름

교향곡 4번은 그가 소나타 형식과 낭만주의적 감성 사이에서 격한 갈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초기 세 개의 교향곡에서 비교적 엄격한 형식을 유지하려 했으나 개인적인 삶의 격변과 감정적 동요로 보다 표현적이고 자유로운 음악을 추구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교향곡 4번은 극적이고 자전적인 요소를 강하게 반영했다. 결국 단순한 일상적 서사가 아닌 내면 심리의 고조와 갈등을 담아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점은 감정적 긴박감과 멜로디의 유려한 흐름이다. 차이콥스키는 멜로디 구성에 있어 전례없는 자유를 발휘했으며 이를 통해 극적인 표현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러한 멜로디 중심의 작곡 방식은 소나타 형식의 전통적인 형식과 균형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초래했다. 감정적 긴박감과 강렬한 멜로디의 조합은 음악적 발전의 전통적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보통의 소나타 형식에는 주제의 리듬적·멜로디적·조화적 잠재력을 점진적으로 확장하며 발전부를 구성하지만 교향곡 4번에서는 이미 완결된 형태의 멜로디가 강한 감정적 표현력을 지닌 채 제시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주제를 변형하며 발전시키는 과정이 어려워졌고 대신 반복과 변형을 활용해 소나타 형식의 논리적 전개를 대체했다. 결과적으로 교향곡 4번은 서양 전통 형식과 낭만주의적 감정 표현 사이 갈등 속에서 탄생한 작품으로 형식적 실험과 감정적 호소력이 결합된 독창적인 교향곡이다.



러시아 철도 미망인 폰 메크 여사
● 초연 혹평 이후 점차 작품가치 인정받아

교향곡 4번은 1878년 2월 22일 러시아 음악협회 콘서트에서 루빈스타인의 지휘로 초연됐다. 초연 당시 엇갈린 평가를 받으며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피렌체에 머물고 있던 차이콥스키는 공연에 대한 소식을 직접 듣기보다 후원자인 나데즈다 폰 메크를 통해 전해 들었다. 공연에 참여한 음악가들로부터 연주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전보를 받았지만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차 작품에 대한 명확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평가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작곡가 세르게이 타네예프는 교향곡이 부분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전체적으로는 인상적이지 않다고 평가했다. 첫 악장을 지나치게 길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작품이 교향곡이라기보다 ‘세 개의 악장이 추가된 교향시’에 가깝다고 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연은 이전보다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주 횟수가 증가했으며 오늘날 오케스트라 레퍼토리의 필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874년 4월 차이콥스키가 그의 동생에게 보낸 편지
● ‘예술적 동반자’ 폰 메크 여사에 헌정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에게 이 교향곡을 “당신을 위한 가장 내면의 생각과 감정의 울림”이라 표현했다. 교향곡 작곡 당시 그는 폰 메크 여사에게 재정적 도움을 받기 시작했고 이 교향곡을 그녀에게 헌정하고 싶다고 밝혔다. 반면 차이콥스키 삶은 비극적인 결혼으로 인해 정신적인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이 헌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가부장적인 러시아 사회에서 예술가와 후원자가 동등한 입장으로 역할을 한 점과 단순히 감사의 마음으로 헌정이 아닌 예술적 동반자로서 표현으로 가치가 있었다. 이는 폰 메크 여사가 작곡의 원동력이 됐으며 창작자로서 동등한 위치였다는 점이다.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요청으로 교향곡 4번에 대한 프로그램 설명을 작성해 이러한 행위가 음악 문헌에서 교향곡을 순수하게 작곡된 음악적 특징보다 가장 이상적인 교향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 연예계 이슈나 정치계 이슈로 부적절한 남녀 관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온 안타까운 뉴스로 나라가 떠들썩하다. 이상적인 만남과 윤리적인 교류였다면 극단적인 선택과 비극도 결말도 없었을 것이다. 벚꽃 필 무렵 4월에 생각나는 차이콥스키의 네 번째 교향곡을 들으며 폰 메크 같은 친구를 기다려 본다.

김성수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공연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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