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어휘가 빈약한 도시
정진탄 뉴미디어본부장 겸 논설위원


뒤늦게 구입해 읽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자서전 ‘지켜야 할 약속’(Promises to keep)을 읽다가 중간에 내려놓았다. 자신의 상원의원 시절 관련 얘기가 너무 많고,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으며, 영어 문장들이 감흥을 주지 못했다. 여기에 비속어가 가끔 등장하는 데 공감하기 어려웠다. (바이든 대통령의 말은 아직도 종종 거칠다.) 이에 앞서 읽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Becoming)은 감동적이었다. 오바마와 사귀는 과정이 흥미로웠고, 주제가 버라이어티했다. 그녀의 글 솜씨는 작가를 능가할 정도였으며 정치 커리어와 삶의 철학이 가미돼 꽤 수준이 높았다. 특히 미셸의 영어 어휘력은 매우 풍부해 인간적 매력을 한층 상승시켰다. 그녀의 자서전은 오바마의 그것보다 인기여서 후속작이 곧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삶의 민낯 반영하는 언어

우리는 결국 ‘말 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고 할 정도로 말이 중요하다. 여기서 말은 단지 입으로 하는 말뿐 아니라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현, 어법 및 단어가 포괄적으로 포함된다. 우리는 아침에 눈 뜨고 저녁에 잠이 들 때까지 말하고 듣는다. 심지어 꿈에서조차 내뱉는다. 말은 의사 전달 수준과 지식 체계를 드러내는 유용한 도구이며, 또한 우리 삶의 민낯을 담은 반영물이다.

조폭의 삶이 거칠기 때문에 말도 자연히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인의 언어는 권력욕을 교묘하게 치장하거나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혹세무민성 표현이 적지 않다. 정치꾼과 같은 선상에 있는 사기꾼의 말이 상대방을 사탕발림으로 유혹해야 하므로 여간 현란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주지하는 것처럼 지역색도 강하게 나타나기 마련이어서 서울말과 전라도말은 현격히 다르다. 서울말은 부드럽고 억양이 거칠지 않으나 전라도말은 상대적으로 이런 게 심하다. 물론 전라도말은 억세지만 의사 전달력에 임팩트가 있고 정이 물씬 묻어난다. 서울 사람의 말에는 시시콜콜한 내용이 많으면서 동시에 잡다한 지식이 동반되는 경향을 보인다. 샐러리맨의 언어에서, 쇼핑하는 주부들 대화에서, 학부모의 자녀 교육 및 과외 관련 의견 속에서 색다른 내용과 지식이 발견될 때가 많다. 물론 이것은 필자 개인적인 느낌이다.

간단히 말해 지방신문과 중앙 일간지를 비교하면 확연해진다. 중앙 일간지는 다루는 주제가 넘쳐나고 심도가 있는데 반해 지방지는 좀체 그렇지 못하다. 또 지방지는 기사를 포함한 글의 표현력과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렇게 말하면 지방지 종사자들에게 대단히 죄송하고 필자의 얼굴에 침 뱉는 꼴이 될 수 있지만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요즘 독자와 뉴스 소비자의 시각에서 보면 금세 인식되는 부분이다.

삶의 무대가 다른 광주광역시 시민의 말은 수도권 시민의 그것에 비해 조악하거나 거칠 개연성이 크다. 특히 어휘가 한정적이며 단조롭다. 버스에 타서 듣는 전화통화, 지하철 내 승객들의 대화, 카페에서의 젊은이들 수다, 도심 곳곳 직장인의 스트레스 잡담 등에서 두드러진다. 여기서 일일이 예시하기 어렵지만 그렇고 그런 얘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최근 광주 도심 한 카페에서 이른 아침 시간, 나이 드신 남녀 3명이 커피와 샌드위치 등을 곁들이며 나누는 대화 내용은 꽤 신선했다. 이들은 건강과 가족 얘기를 연거푸 하더니 갑자기 건축물의 일조량으로 화제를 옮겨 의견을 주고받고, 제주도 생태계 훼손에 대한 우려, 한미 및 한중 관계 등 국제 정치에 관해 자유스럽게 의견을 교환했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시각 광주 도심 카페에서 다종다양한 화제를 다루는 이들을 마주하기 매우 힘들다.

광역도시다운 모습은 언제

삶의 관심사가 폭 넓고 깊어야 동원되는 대화 어휘가 다채롭고 풍부해질 것은 불문가지다. 생활 여유와 경제적 풍요가 뒤따라야 등장하는 단어가 억세지 않고 억양이 부드러울 것이다. 광주광역시의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시민들의 대화 내용, 특히 어휘 사용량과 그 폭이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광주광역도시 내 어휘는 수도권, 타 광역단체에 비해 다소 단조롭고 빈약하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필자의 인상 평이기에 객관성을 띠지 않는다. 아직 각 도시마다 어휘 총동원량을 측정한 과학적 통계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광주광역시의 어휘 빈약성은 도시 경쟁력이 떨어지고 후진성을 면치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팩트를 중시하는 분을 위해 보충하자면 최근 한국은행 광주전남본부와 호남통계청 등의 정기적인 경기동향 보고서엔 지역 경제가 괄목하게 회복하거나 성장했다는 희소식이 없다. 반대로 하방 곡선을 그리며 경제고통지수가 커진다는 지적은 많다.

어떻든 시민들의 대화 주제가 폭 넓고 동원되는 어휘가 풍부해지려면 무엇이 시급한 일인지 함께 생각해봤으면 한다. 간헐적으로 촌락공동체적 인상을 주는, 격하된 광역도시의 면모를 언제 바꿀 수 있는지 고민이 깊어질 때가 있다. 도시 발전을 누가 맡고, 어디서 주도적으로 나서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