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눈(雪)이 내렸다. 117년 만의 11월 큰 눈이라는데 내 기억에도 근자에는 겪지 못한 큰 눈이다. 하도 큰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서 이젠 ‘큰’이란 말에도 둔감해진 줄 알았는데 대설(大雪)이나 폭설(暴雪)이 아니라 ‘큰눈’이라 하니 느낌도 상황도 달라 보인다. 육교가 무너지고, 축사와 비닐하우스들이 주저앉아 버리고 전선이 끊어져 온 동네에 전력공급이 안 되고 야간작업 중 천장이 무너져 인명피해가 나는가 하면 살던 집이 무너져 있을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 뉴스는 이런 사실을 보도하면서 눈의 피해를 알려왔다. 어떻게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눈이 내릴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많이도 내렸다. 그러니 큰 눈이라기보다는 많은 눈이지만 대설도 폭설도 왠지 실감이 안 나고 내겐 ‘큰 눈’이라야 더 어마어마하다는 느낌이 든다.

큰 눈에 제일 먼저 교통이 문제가 되었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전철 역으로 나갔는데 내가 늘 타는 전철역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타는 줄 몰랐었다. 눈(雪)으로 도로 이용이 불가능해지자 모든 사람이 다 전철로 몰렸는지 전철역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다. 그런데 하행인 인천 수원행엔 사람이 들어가고 상행인 왕십리 행은 못 들어가게 막아놓은 줄의 긴 행렬이 네 줄이나 된다. 대충 헤아려 봐도 대기인이 1천 명도 넘을 것 같다. 왕십리로 가는 상행은 아예 들어갈 수도 없게 막고 있다. 방금 나온 나는 몇 시간을 기다려도 차를 탈 수 없을 것 같다.

강의 시간은 다가오고 결국 생각해 낸 것이 거꾸로 수원으로 가서 거기서 타고 오자는 약간의 꼼수가 발동되었다. 해서 수원으로 가서 왕십리 행을 탔다. 오면서 보니 내가 타는 칸에선 겨우 세 명이 탔는데 문도 못 닫아 몇 번을 열었다 닫았다 한 후에야 겨우 출발했다. 그러니 나는 선택을 잘한 것 같다. 왕복 한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그냥 순서를 기다렸더라면 더 어림없었을 것이다.

큰일, 우린 큰일은 천재지변쯤으로나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도 분명 천재지변이다. 117년 만에 맞는 11월의 큰 눈이란다. 어린 날 성탄절에 가슴까지 차오른 눈을 뚫고 새벽 송을 다니던 때가 새삼 생각난다.

사실 어제도 병원에 다녀오다 혼이 났었다. 차를 몰고 나갔는데 눈발에 앞이 전혀 안 보이고 길은 얼고 눈이 쌓여 얼마나 두렵고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신호를 받고 서 있는 내 차를 뒤에서 받는 일이 생겼다. 미끄러워 제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어서 괜찮았지만 그러고도 집에 와서는 오랜만에 보는 환상적인 설국(雪國) 설경(雪景)에 연신 아이마냥 환호하며 카메라를 들이대곤 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눈은 나이 많고 적음이 아니지 않던가.

요즘 세상은 너무나도 큰일들이 많이 터져 좀처럼 놀라지도 않는다. 얼마큼 큰일인지 그냥 무덤덤하게 지켜보거나 듣곤 한다. 그런데 이번 큰 눈은 진짜 큰 눈이다. 잠시 마트에 갔다 오는데도 길가의 단풍나무와 소나무가 눈의 무게를 못 이겨 내 머리 위에서 우지끈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혼비백산을 했다. 여름 내내 그 거센 비바람도 이겨낸 나무인데 말이다. 나뭇가지에 눈이 얹히자 그 무게를 감당 못 한 것이다. 이래서 자연 앞에 겸손하라는 것일까. 불가항력이란 말은 자연 앞에만 가능한 말일 것 같다. 내리지 않는 비에 쩍쩍 갈라지던 논밭이다가 너무 비가 많이 내려 둑이 터지고 홍수로 논밭이 쓸려가는가 하면 이번의 눈처럼 한꺼번에 너무 많이 내려 세상이 감당을 못하는 것을 보면 아무리 과학 문명이 발달한 현대라 해도 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도 작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크다는 것은 단순히 크기나 양뿐이 아니라 무게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큰 눈, 큰 일이라면 사람들은 ‘큰’자에 지레 놀라곤 한다. 크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고 많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지 않던가. 부족함보다 넘쳐나서 더 어려움을 겪는 때가 많음은 꼭 이번만도 아니잖는가. ‘큰 눈’ 앞에서 또다시 작아지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