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장흥에 있는 정남진 시네마에선 내가 원하는 영화를 상영하지 않았고 가까운 보성과 강진을 찾아보니 최근 오픈한 강진 작은영화관에서‘승부’를 상영하고 있다는 소식에 강진으로 향했다. 장흥에서 강진영화관까지는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앞으로 이곳에 와서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영화 상영 5분을 남겨놓고 도착한 강진 작은영화관은 1관, 2관 총 두 관이 있었으며 시설도 꽤 괜찮았다. 거기에 7,000원이라는 영화비 역시 너무 착했다. 오호~ 이 정도면 너무 괜찮은 퀄리티였다. 왠지 자주 올 것 같다.
극장에 들어서자 평일 낮이라 그런지 관객은 어느 여성분과 나 이렇게 둘 뿐이었지만 오롯이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내심 안도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실화라서 더 화제인 영화‘승부’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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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승부’의 한 장면. 조훈현 국수를 연기한 배우 이병헌과 제자 이창호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배우 김강훈이 바둑을 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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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승부’의 이병헌(왼쪽)과 조우진. 각각 한국 바둑의 전설 조훈현 9단과 극화한 인물 남기철 9단을 연기했다. |
● 조훈현 vs 이창호, 영화‘승부’
1989년 조훈현 9단이 세계 대회에서 중국의 섭위평 9단을 누르고 우승을 하면서 대한민국은 바둑의 열풍에 휩싸인다. 1990년대 초는 바둑계의 레전드 조훈현(이병헌)이 거의 전승에 가까운 승률로 정상에 군림하던 시기였다. 어느 날, 한 대회에서 전주의 바둑 신동이라 불리는 어린 이창호를 발견한 조훈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이창호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기로 결심, 집으로 데려온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창호는 스승 조훈현과는 다른 자신만의 바둑에 대한 기풍을 찾으려 노력한다.
스승인 조훈현은 바둑판 앞에서 맹렬하게 싸우는 공격적인 기풍이라면 제자인 이창호는 돌부처와 같은 차분함으로 수비적인 바둑을 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기풍을 만들어낸다. 그런 이유로 둘의 관계는 미묘한 충돌로 삐걱대기도 하지만 이창호는 조훈현의 철두철미한 가르침 속에서 놀라운 속도로 성장한다.
바둑 최고위전에서 이창호가 다른 프로들을 꺾고 결승국에 올라오게 되면서 조훈현은 제자 이창호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바둑계를 뒤흔든 세기의 사건이 되고 이 대회에서 조훈현은 제자 이창호에게 패배하게 된다.
제자가 스승을 이겼다는 것도 놀랍지만 국내외적으로 바둑계의 최고였던 조훈현의 패배는 대서특필된다. 이후 모든 타이틀에서 이창호에게 패배하게 된 조훈현은 슬럼프에 빠진다. 그러나 조훈현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창호와의 대결에 승부수를 던진다.
영화는 약간의 허구를 가미한 실제 인물인 바둑계의 전설 조훈현과 이창호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바둑 영화다. 지금까지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로는‘신의 한 수(2014)’,‘미생(2014)’ 등이 있었지만 실제 인물을 등장시켜 스토리를 끌어가는 바둑 영화는 처음이다. 영화는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 청출어람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이상의 것을 이야기한다.
좌절하지 않고 또 한번 도전을 하는 조훈현의 모습과 마지막까지 제자를 응원하고 챙기는 그의 모습에서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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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승부’ 포스터 |
● 인생도 바둑판과 같다
조훈현의 빠르게 치고 빠지는 도전적인 기풍과 이창훈의 차분하면서도 득도한 듯한 바둑의 기풍은 우리네 삶을 뒤돌아보게 했다. 살다 보면 때론 상대방을 뒤흔들 수 있는 처음부터 강렬한 한방이 필요한 때도 있지만 담담히 상대를 관찰하면서 기다리다 보면 상대를 넘어뜨릴 어떤 기회가 찾아오는 경우가 더러 있다.
영화에서 조훈현의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의 “답이 없으면 답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바둑”이라는 말과 조훈현이 “바둑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한 말처럼 우리들 삶도 정답은 없는 것 같다.
단지 정답을 찾아 부지런히 삶을 살아가고 바둑에서 복기(復碁:바둑에서 한 번 두고 난 바둑의 판국을 비평하기 위하여 두었던 대로 다시 처음부터 놓아 봄)를 꼭 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다시 되돌아보며 거기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인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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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승부’에서 조훈현 국수와 그의 제자 이창호의 대국 모습. |
● 그럼에도 나에게는 2% 부족했던 영화
영화를 연출한 김형주 감독은 ‘보안관(2017)’이라는 작품을 시작으로 이번이 두 번째 작품이다. 영화‘군도(2014)’의 윤종빈 감독이 제작자로 참여한 것을 보면 ‘군도’의 조감독이었던 김형주 감독과의 인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김 감독은 다소 밋밋할 수 있는 바둑 경기 장면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기법을 선보이며 스승과 제자 간의 미묘한 감정선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내면적인 갈등을 잘 표현해 냈다. 또한 1990년대 초라는 설정에 맞게 의상부터 바둑 TV 방송, 그리고 그 시대의 인물들, 특히 실존 인물인 조훈현과 이창호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낸다. 그리고 실존 인물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낸 이병헌과 유아인의 연기는 영화의 모든 것을 완성해 낸다.
1990년대 초를 살아 본 나 역시도 당시 TV에서 방영됐던 바둑 대회가 떠올랐을 정도로 영화는 그 시대를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나를 힐링시키지는 못했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에 대한 감흥에 의해 뿌듯함과 희열을 느끼는 나에게 영화‘승부’는 2%의 부족함을 느끼게 했다.
영화의 전반적인 감정의 흐름이 모두 조훈현에 맞춰져 있었던 점, 이창호의 감정적 세밀함이 보이지 않았던 점, 그리고 급하게 전개되는 뒷부분의 흐름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1990년대를 연상시키는 잘 짜여진 미장센, 바둑 대회의 긴장감을 제대로 살린 촬영기법, 그리고 실존 인물을 떠오르게 하는 배우들의 연기까지 삼박자를 두루 갖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한가지가 빠진 듯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꼭 한번 볼만한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2021년에 완성됐지만 넷플릭스 공개를 앞두고 유아인 배우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미뤄지다가 4년 만에 스크린을 통해 보게 된 영화‘승부’. (개인적으로 넷플릭스 공개가 아닌 스크린에서 볼 수 있어 좋았지만)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다니 스크린에서 못 본 관객이라면 OTT로 봐도 좋을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정말 바둑판과도 같다면 조훈현의 기풍과 이창훈의 기풍을 조화롭게 영위할 수 있도록 그때그때 내 삶을 복기하며 살아 보려 한다. 지금 나에겐 조훈현의 날카로운 도전과 이창호의 진득한 수비가 절실히 필요하다.
*정주미=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대학원 예술학 영상학과 박사, 전 광주독립영화관gift부관장·프로그래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