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보내고 다시 새해를 맞는다. 하지만 흐르는 물속에는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은 이미 그 물이 아니요 발도 그 발일 수 없을 만큼 시간은 흘렀고 시간 따라 모든 것도 변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연례행사처럼 후회와 새 다짐의 시간을 갖는다. 보낸다는 아쉬움과 새로이 맞는다는 기대는 누구나 갖는 공통된 상념일 것이다. 보낸다는 것에도 누구는 제발 어서 가라며 속 시원함을 드러내지만 멀건히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황망함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보내려 한다고 보내어지고 보내고 싶지 않다고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다. 사람의 의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섭리고 이치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이란 선물을 얼마나 유용하게 내게 맞게 사용하는가는 각자의 능력일 수 있지만 처한 환경과 조건이 어떻게 합류해 주느냐에 따라 멋지고 아름답거나 모질고 뼈아프게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도 어느덧 칠십 중반에 이르다 보니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접하게 된다. 부끄러움은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렸는가 그럼에도 이것이다 하고 내놓을 것이 없다는 것이요, 안타까움은 이렇게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으니 이제 와서 무언가를 시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갑자기 무엇을 만들어 낼 수도 없음이다. 어느 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추레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은 꼭 나만은 아닐 것 같다. 그러나 한 편 생각하면 여기까지 이른 데 대한 감사와 이만큼 이룬 것조차 결코 내 힘으로만 아닌 수많은 도움이었다는 데 대한 고마움이 눈물겹도록 느껴진다.

삶은 결코 어느 한 순간, 어떤 것도 소중치 않은 게 없고 값지지 않은 게 없다는, 오로지 내가 최선을 다해 만든 오직 단 하나 나의 작품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중심으로 어제까지가 2024년이고 오늘부터는 2025년이라는 세월의 경계 앞에서 한 해 동안 여기까지 도우셨고 한 해라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심을 절실히 깨닫는다. 이 감사와 희망감이야말로 삶을 살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새해를 맞으며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영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주소록과 전화번호부 정리다. 전에는 새 수첩에 옮겨적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핸드폰 상에서 손쉽게 정리하면 된다. 한데 가나다순 이름으로 검색하다가 삭제해야 할 이름 앞에서 손이 굳는다. 아니다. 마음이 먼저 굳는다. 한 해 동안 세상 인연이 다해 저 세상으로 거처를 옮기신 분들이다. 지난해엔 특히나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여러분이 가셨다. 분명 가셨는데도 여전히 계신 것처럼 여겨지는 분들, 그래서 지난해에도 몇 분은 지우지 못했었다. 그러다보니 남아있는 분들이 꽤 된다. 그걸 지워버리면 그분들과의 모든 기억들도 함께 지워져 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겨진 이름들은 검색 과정에서 이상하게 자주 마주치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분들과의 기억들을 생각케 되고 그분들과의 인연에 새삼 감사를 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보낸다는 것은 없어져 버린다는 것과는 다른 것 같다. 결코 소멸은 아니라는 말이다. 떠나간 자리엔 흔적이 남고 보이지 않는 흔적으로 그리움이 남는다. 그리움은 보는 것보다도 더 강한 기억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또 안타까워지는 것은 내 생명의 촛불이 점점 짧아져 가고 있다는 것도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을 곧 더 많이 볼 수 없겠다는 아쉬움이다. 해서일까. 지난해에 보내던 한 해와 이번에 보내는 한 해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더 안타깝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놓쳐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한 편 생각하면 보내고 맞는 것은 현기증 날만큼 변하는 놀라움의 세상을 맞는 감격이기도 하다.

새해엔 중학생이던 친손녀와 외손녀가 고등학생이 된다. 초등학생이던 손녀는 중학생이 된다. 내가 늙어간다는 것, 내가 보내버린 한해만큼 아이들은 성장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선다. 나의 시대가 간다는 것은 내 아이들의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는 해의 마지막 아름다움처럼 나도 다만 저들에게 깊은 인상 아름다운 기억으로 멋지게 남고 싶다. 그러려면 송구영신은 결코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는 것이 아니라 보낼 것은 보내고 맞을 것을 맞는 것이다. 보다 새로운 것, 보다 멋진 것, 보다 위대한 것을 맞아들이는 거룩하고 엄숙한 의식으로의 송구영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