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에 걸어둔 꽃 한 다발은 한때 싱싱하게 꽃피어났던 꽃의 감정을 허공에 말리고 있는 걸까. 제 기다림과 설렘으로 꽃의 생각을 환하게 켜둔 보랏빛이 이제는 말라 있다. 마른 꽃잎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리면 그동안 외면했던 꽃의 상흔이 와르르 부서질 것 같다. 생기발랄했던 빛깔과 향기를 지우고 미라처럼 마른 꽃. 꽃은 자신의 죽음을 애도해 달라고 나로 하여금 벽에 못을 박고 꽃의 관(棺)을 그 벽에 매달아 놓게 한 걸까. 아니면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꽃의 아픔처럼 내 청춘의 짝사랑을 애도해 달라는 뜻일까.

전남대학교 국문학과 3학년 여름 무렵이었다. 수업을 앞두고 복도에서 창밖의 등꽃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 학과에서 꽤나 예쁘장한, 특히 타과 남학생들에게 인기 높았던 여학생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한낮의 등 뒤로 그 여학생을 향한 짝사랑의 이력을 읽어 내려가는 등꽃 향기가 어질어질 눈뜨고 있었다. 밑줄 긋듯 설렘을 정독한 복도가 갓 출간된 신간처럼 그녀의 발소리를 들려주었다. 수줍어하며 내가 자리를 비켜주려고 하자, 그녀는 말을 걸어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녀는 속삭이듯 물었다.

“처녀 젖가슴과 유부녀 젖가슴의 차이가 뭔지 아니?”

나는 느닷없는 습격성 질문에 당황하며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얼굴이 빨개진 나를 놀리듯이 그녀가 말했다.

“유부녀 젖꼭지는 아래로 처져 있는데 반해, 처녀 젖꼭지는 처지지 않고 빳빳이 고개를 들고 있어. 그게 다른 점이야.”

이 말을 한 뒤, 그녀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다. 연애 경험이 없는 나는 그녀의 말을 해석하려 애쓰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시각과 청각만 집요하게 꺼내 놓는 떨림은 나의 생각과 감정을 집어삼켜 버렸다. 그녀의 말에서 뼈와 살을 분리해 말의 의미를 해독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해 버렸다. 설렘의 군락지 같은 오후의 혈관은 급기야 터지기 시작했다. 급히 등꽃의 피와 향기로 수혈해 위기를 넘겼다.

그 후로 시간이 꽤나 흘렀지만, 그녀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어 애만 태웠다. 어떤 날은 책으로 내 등짝을 살짝 건드리며 그녀는 지나갔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녀는 등꽃처럼 보랏빛 매혹의 전략을 구사하는 꽃의 언어로 다가왔지만 나는 그것을 번역할 수 없었다. 그녀가 드리운 시름시름 앓는 꽃그늘에서 짝사랑만 과묵해져 갔다.

수십 번의 등꽃이 피었다 진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여고 교장으로 발령받았다며 짧고도 반갑게 안부를 전해왔다. 그녀는 더이상 내 마음을 젖게 만드는 꽃비를 몰고 오지 않았다. 몸살 앓는 꽃사태도 일어나지 않았다.

현관의 꽃을 올려다본다. 청춘의 짝사랑 같은 꽃이 비닐 관(棺)에 담겨 있다. 짝사랑의 슬픔이 이제는 미라처럼 말라 아름답게 걸려 있다. 낮과 밤이 꽃의 발등을 밟고 지나가도 움찔 놀라지도 않는 저 부동의 자세. 짝사랑의 기억을 품고 있는 저 꽃은 안간힘으로 피었다 안간힘으로 져 버린 가장 화려한 유적이다. 가고 없는 꽃향기에 짝사랑의 유적이 때늦게 꽃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