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대에서 먼저 거둬서 정돌이로 불렸지만 사범대에서 교육상 안좋으니 우리가 맡겠다며 소유권을 주장하던….”
“학생회관이나 민주광장에 가다보면 항상 바지런하게 돌아다녔잖아요. 하루에 밥 몇끼는 먹었을거예요. 만나는 사람마다 밥 먹었니? 이러니까.”
“정돌이만 잡아가면 다 잡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애가 다 봤으니까 이름을 다 알거 아니예요.”- 고려대학교 84, 85학번들의 증언들
“귀에 익은 장구소리가 들리네요. 최루탄 소리, 형들의 함성도 들리는 것 같네요. 여기는 저의 집, 고려대학교. 제 이름은 정돌이입니다.”로 시작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정돌이’.
고려대학교 정문 앞, 사물놀이 미르 대표인 송귀철은 자신을‘정돌이’라고 소개하며 1987년 그날의 봄으로 회귀한다. 매일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두른 아버지 때문에 7살 때 엄마가 집을 나가고 그런 아버지를 보살피면서 공병을 모아 14살 때 무턱대고 경기도 연천에서 서울로 상경한다. 한마디로 집을 나온 것이다.
그는 청량리역 근처를 배회하다 잘 곳이 없어 들어간 심야 만화방에서 우연히 고대생(행정학과 84학번 서정만) 형을 만나게 된다. 민주화운동으로 수배중이던 고대생 형은 갈 곳이 없는 송귀철을 고대 캠퍼스로 데려오게 되고 이후 송귀철은 정경대 학생회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고대 캠퍼스는 그의 놀이터가 된다. 이를 계기로 송귀철은 고대 정경대에 사는 꼬마, 정경대 마스코트‘정돌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
정돌이가 고려대에 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캠퍼스를 뛰어다니는 정돌이에게 ‘밥은 먹었니?’라며 만나는 이들마다 밥걱정을 해주는 탓에 어느날은 하루에도 여섯 끼를 먹었을 정도로 운동권 형과 누나들의 사랑을 받았던 정돌이. 정돌이가 고대에서 살게 된 1987년은 전두환의‘4·13 호헌’으로 대학의 민주주의 운동이 어느때 보다도 뜨거웠던 시절이다.
그러한 시절에 정돌이는 배고픔에 굶주린 자신을 받아준 고려대를 집으로 여기고 운동권 형과 누나들을 가족이라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6월 민주화 항쟁, 이한열 열사 노제, 그리고 1987년 12월 대선 개표 부정으로 인한 구로구청 투쟁때도 정돌이는 그들과 그곳에 있었다.
고려대를 제 집 마냥 돌아다니던 정돌이는 어디선가 들려온 장구 소리에 매료돼 고려대 농악대 ‘탈사랑우리회’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장구를 배운 정돌이는 자신만의 꿈을 갖게 되고 30여 년간 장구를 치면서 현재는 사물놀이 계승에 힘쓰고 있는 풍물패‘미르’의 대표가 되었다. 그는 80년대 고려대에서 함께 했던 운동권 형, 누나들에게 배운 정신으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 때도 지금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시위대 맨 앞에서 장구를 치고 있다.
영화‘정돌이’는 개봉 전부터 MBC 뉴스, 매불쇼, 김어준의 뉴스공장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된 바 있으며 이 영화를 연출한 김대현 감독은 4년 전 쯤 광주영화학교에서 영화 프로듀서 강의에서 강사(김대현 감독)와 학생으로 만난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 영화에 대한 궁금이 일어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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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에서 생활하는 ‘정돌이’를 소개한 신문 기사 |
●14세 소년 정돌이의 시선으로 본 1980년대 학생 민주주의 운동
영화는 14세 소년의 시선으로 격동의 1980년대를 이야기한다.
당시 14세였던 송귀철의 모습을 대신한 또래 소년의 등장과 내레이션은 극의 몰입감을 조금 방해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시대의 정돌이와 지금 우리가 조우하는 가교역할을 하는 듯 극적이다.
영화는 정돌이 송귀철과 80년대 고대 운동권 학생이었던 이들의 생생한 기억들에 기반한다. 여기에 더해진 당시의 사진과 방송 영상물들은 정교하게 잘 짜여져 격동의 80년대를 기억하고 기록한다.
영화‘정돌이’는 다큐멘터리의 정석인 인터뷰와 사진, 영상물, 내레이션이 화를 이루며 전개되지만 여타의 다큐와 다른 점이라면 한 인물의 인생에 대한민국의 격동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 것이 극영화처럼 드라마틱하다. 마치 영화‘포레스트 검프’처럼 말이다. 불우한 가정사로 가출을 해야만 했던 소년이 우연히 운동권 형을 만나 그를 따라 고려대에서 기거하게 되면서 운동권 형, 누나들을 따라다니며 시위대에도 참여하고 대학 동아리에서 장구를 배워 지금은 장구 명인이 된 이야기는 한 편의 극영화처럼 들린다.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이라는 생각으로 살게 된 고려대에서 자신을 돌봐주던 형, 누나들이 갑자기 잡혀가거나 죽거나, 하나 둘 사라질 때 느꼈을 정돌이의 슬픔은 어린 마음에 커다란 시련이었다. 자신을 도와준 형, 누나들에게 보탬이 되고파 시위대에 참여하게 되면서 80년대 암울한 정치와 민주화운동의 한 장에 그도 함께이게 된 것이다.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역사적인 소용돌이 안에서 사실로 기록될 때에는 역사의 한 장이 되는 것처럼 영화는 개인의 이야기가 담긴 14세 소년의 미시사를 통해 1980년대라는 대한민국의 격동의 거시사를 끄집어낸다.
●386(586) 세대의 저항, 연대 그리고 침묵
영화는 정돌이를 매개체로 1987년 고려대 운동권 학생들을 재조명한다.
386(30대, 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세대로 불리던 그들은 지금은 50대가 된 586세대로도 명명되기도 하는데 민주화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던 운동권에서 노동 현장으로 흘러 들어간 묵묵하게 민주주의에 대한 소신을 지켜온 사람들이다.
수감 중이다 갑자기 풀려났지만 풀려난 이유도 모른채 지내다가 노모가 집에 있는 패물을 팔아서 받은 50만 원을 검사에게 갖다줘 풀려나게 됐다는 것을 결혼하고서야 뒤늦게 알게 됐다며 눈시울을 붉히는 누군가의 이야기, 운동권 동료였던 친구가 군에서 의문사한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 아직도 힘쓰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 대학 졸업 후 구두닦이 일을 선택한 누군가의 이야기, 민주화운동 전과로 인해 정식 취업은 못하고 학원 인기 강사 됐지만 회의감이 들어 그만둔 이야기, 운동권에서 노동의 현장으로 들어가 또 다른 노동운동을 하게 된 이야기 등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저항과 따듯한 연대가 담겨 있지만 지금은 자신들이 80년대 학생 운동권이었다는 사실을 침묵하고 있다.
당시 운동권이었던 세대들 중 일부가 정치판에 들어오면서 그들의 횡보로 인해 386세대들이 대중들에게 외면받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소신을 가지고 묵묵하게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마저 스스로를 침묵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1987 학생민주화운동의 발로, 5·18광주민주화운동
영화는 고려대 학생 운동을 바탕으로 당시를 기록하지만 그 안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저변에 깊이 깔려있다. 그들이 민주화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바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이었기 때문이다. 학교 동아리방에서 몰래 본 광주5·18에 관한 비디오는 고려대에서부터 전국의 대학교로 전파됐으며 고려대 운동권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열망하게 된 것도 전국의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도 모두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을 이 영화를 통해 다시금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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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정돌이’ 포스터 |
●1980년대 고려대 학생이었던 김대현 감독이 전하는 말
‘정돌이’를 연출한 김대현 감독은 고려대학교 85학번으로 경영학과를 졸업 후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영화 연출을 전공, 1990년부터 영화를 제작했다.
단편 ‘서울길’로 1991년 대한민국창작단편영화제(서울독립영화제 전신)에서 수상했으며 1995년에는 서울국제독립영화제를 개최하는 등 영화하는 후배들과 함께 영화 운동을 하며 독립영화 제작과 배급에 힘썼다.
2015년에 제작한‘다방의 푸른 꿈’은 4년여 동안 공을 들여 한류의 걸그룹 원조라 할 수 있는 김시스터즈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묶은 작품으로 그해 제천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다.
그는 한 매체에서 “내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는 생각에 무척 괴로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정말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정돌이를 통해 80년대 학생 운동의 기록을 남긴 영화, 386세대에 관한 당시의 진실을 엿 볼 수 있는, 지금 시기에 꼭 봐야 할 당위성을 가진 절실한 영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지금의 MZ세대들에게 꼭 한 번 보여주고 싶은 영화 ‘정돌이’는 광주독립영화관, 광주극장에서 볼 수 있다.
*정주미=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대학원 예술학 영상학과 박사. 전 광주독립영화관gift부관장·프로그래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