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벗고 바람을 껴입은 오징어를 수납장에서 꺼낸다. 하얀 가루에 제 아픔을 숨기며 얼마나 많은 상처를 억누르고 눌러왔으면 저리 바짝 말라 있는 것일까. 배를 가르는 어느 아낙의 손끝에서 바다의 시간은 버려졌지만, 아픔을 기억하는 등뼈는 아직도 단단하다. 막무가내와 어지러움을 켠 집어등 불빛을 만나기 전에는 일렁이는 물결 골목을 여덟 개의 발로 명랑하게 흘러다녔을 테지.

어릴 적 나는 명랑한 오징어처럼 골목과 골목에 빨판처럼 들러붙어서 해 질 녘까지 놀곤 했다. 그러다가 무슨 일 때문인지 화가 나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끙끙 앓았다. 다른 사람에게 분풀이를 한다거나, 소리를 지른다거나, 엉뚱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오로지 오징어 먹물 같은 화를 혼자 뒤집어쓰며 가슴으로만 삭혔다. 그런 날은 몸피 가득 비린내를 묻혀 오는 화에 저녁의 평온은 싹둑싹둑 잘려나갔다. 어머니가 이불을 들추며 무슨 일 있냐고 물어도 나는 단호히 아무 일 없었다면서 이불을 다시 끌어다 덮곤 했다. 분노라는 거친 혈류가 솟구치는 아픔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 바다는 어지러운 마음 소리 키우는 물의 후음이 소용돌이치고 있어 매서웠다. 화가 어느 정도 사그라들 때까지 어머니의 염려를 뒤로한 깜깜한 물살이 출렁거려 시끄러웠다.

이 버릇은 나이가 들어 더 큰 화에 휘말려 들어도 계속되었다. 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준 사람, 나에게 지독한 모욕을 준 사람, 나의 성장을 짓밟는 사람, 이들에게도 나는 당장 대들지 않았다. 속으로만 분을 삼키며 견디었다. 화를 풀지 못한 아픔들이 쌓이고 쌓여, 끝내 내 가슴에 돌팔매질을 해대도 나는 피할 수가 없었다. 퍽퍽 돌이 날아들고 우르르 돌 구르는 소리가 가슴 밑바닥을 시끄럽게 했다. 쌓이고 쌓인 소리들이 가슴뼈에 하나 둘씩 박히며 단단한 암초가 되어 갔다. 어릴 적부터 화는 무조건 참으면 해결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그렇지가 않았다. 어느 날 일상의 소소한 감정들이 가슴뼈 암초에 부딪혀 좌초되면서 호흡 곤란이 오기 시작했다. 가슴 통증은 심해지고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해 왔다. 나는 으르렁거리는 돌멩이를 가슴뼈에서 뽑아내려고 애썼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이 박혀 들어갔다.

마른 오징어를 가스불에 구운 후, 접시에 담는다. 마요네즈를 묻혀 오징어를 씹는다. 흐물흐물 단내가 날 때까지 오징어를 곱씹는다. 호흡 곤란을 일으키며 가슴뼈에 암초처럼 박힌 아픔들도 다시 끄집어내어 오징어처럼 입안에서 곱씹어 본다. 수십 년 동안 소화되지 않은 채 몸 어딘가에 남아 있던 아픔들이 마른 오징어처럼 여전히 질겨 잘 씹히지 않는다. 대충 씹고 삼킨 오징어가 체증을 일으키듯 질긴 아픔의 힘줄인 화를 그냥 삼켜 호흡 곤란 같은 마음의 체증을 일으켰던 것일까. 아니면, 잇몸이 부실한 감정의 어금니로는 제대로 씹을 수가 없어 끝내 체증을 일으켰던 것일까. 선반에서 오징어 한 마리를 더 꺼내 가스불에 굽는다. 오징어는 불의 바닥을 짚고 뜨거운 쪽으로 오그라들고 있다. 물결 골목을 헤집고 다녔던 그 뜨거운 바다의 심장 소리를 조금이라도 듣고 싶은 것일까. 오징어는 둥글게 제 몸을 말고 또 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