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을 때마다 슬슬 겁이 난다. 흰머리가 솟는 것이야 세월과 함께 당연한 순리이지만, 날이 갈수록 성글어지는 머리숱을 바라볼 때면 난감함과 함께 처량한 생각까지 든다.

한 올이라도 아껴보고자 조심조심 빗질을 해보지만 가을 낙엽 지듯 스르륵 스르륵 흘러내리면 가슴까지 섬뜩해진다. 추운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가을이면 짐승의 털이 새로 돋아 가늘어진 것에서 ‘추호(秋毫)도 없다’라는 말이 생겼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죽을 때까지 피부나 다름없이 간직하고 살아야 할 사람의 머리털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짐승은 물론 산천초목들까지도 1년에 한 번씩은 고운 털과 잎으로 갈아입곤 하는데 사람은 나이 들어 빠지면 그만이니 허망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원래는 나도 부모님께서 흑단같이 탐스러운 머리를 갖고 태어나게 해주셨다. 여학교 시절에는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 타래가 둔탁하고 미련해 보인다는 이유로 숱이 적고 발이 가늘어 머리를 흔들 때마다 찰랑거리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탈모 고민을 하다 보니 불현듯 과오 하나가 떠올라 고개조차 들 수가 없다. 달보드레한 군입정이 귀하던 시절, 고요한 시골 마을에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은 둥둥 들떠 온 집안을 뒤지고 다녔다. 기껏 구멍 난 고무신, 농기구에서 떨어져 나온 쇠붙이, 빈 병 등이 전부였지만, 급하면 신던 고무신까지도 들고나왔다. 그런 가운데 엿장수가 유난히 환영하던 물건이 있었으니 그 대단한 정체가 바로 인모(人毛)였다. 우리 집에서도 식구 누구나 머리를 빗다가 머리카락이 빠지면 돌돌 뭉쳐서 처마 밑에 걸린 표주박 속에 모으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있었다. 젊은 엄마나 고모들은 탈모가 있을 리 없었으니 모여진 대부분이 할머니 머리카락이라는 것쯤은 익히 아는 일이었다. 어쨌든 동네에 엿장수가 나타나면 나와 동생들은 표주박에 손을 넣어 잡히는 머리카락의 양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곤 했다. 달콤한 엿을 먹는 재미도 컸지만, 침을 삼키는 동네 아이들 앞에서 가위로 엿판을 탕탕 쳐서 끊어 주는 엿을 받아드는 순간은 우쭐하기까지 했다. 비녀를 꼽아 올린 할머니의 쪽머리 크기가 나날이 작아지든 말든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와서 헤아려보니 말이 할머니지 겨우 50세 안팎에 불과한 한창때였다. 여자로서 충분히 고울 때이고 또 곱고 싶은 시기이다. 그저 철부지에 불과했던 우리들은 할머니의 머리가 하염없이 빠져주길 호시탐탐 노리면서 엿을 바꿔다가 먹어 치우곤 했으니….

‘효경’의 첫 구절을 애써 떠올리지 않더라도 자신의 몸을 소중하고 건강하게 가꿔 보존하는 것은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일 중 가장 첫 번째일 것이다.

한 해, 한 해 연세가 늘어갈수록 더욱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부모님께 흉한 모습을 남겨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분명 노력을 해야만 한다. 오늘도 거울 앞에 앉아 보물단지를 다루듯 조심조심 머리를 빗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