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란다. 봄은 겨울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생명이 태동한다는 희망으로 부푼 계절이다. 한데 봄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요즘은 비교적 사계절이 분명한 우리나라인데도 지구온난화로 언제부턴가 봄과 가을이 실종되어 버렸다고들 말한다.

달력상으로 절기를 나누자면 3월부터 5월이 봄이다. 하지만 절기상으론 입춘(立春)이면 봄이 온 걸로 생각하는데 금년은 지난 2월 4일이었다. 벌써 그로부터 20일이나 지난 것이다.

봄 소식은 화신(花信)이라 하여 꽃 피는 시간으로도 전해온다. 봄에 일찍 피는 꽃으로는 매화, 산수유, 개나리, 동백 등이지만 이름만으로도 봄을 부르는 영춘화(迎春花)가 있고, 눈 속에서 복수초(福壽草)가 핀다. 변산바람꽃이 맨 먼저 핀다는 사람도 있다.

봄철에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와 느낌으로도 봄을 알게 된다. 봄철에 불어오는 바람은 동풍(東風)이라고 하는데 동쪽은 태양이 뜨는 쪽이어서일까. 불어오는 춘풍을 받아 나뭇가지에 새싹이 움트고 꽃봉이 맺히고 잠든 땅이 깨어나며 산과 들의 색깔이 바뀐다. 그때쯤이면 입맛을 돋구는 무언가도 그리워진다. 맞다. 새 생명이 움트는 계절인 봄엔 먹거리도 한 몫 한다. 도다리쑥국 아니 달래간장에 비벼 먹는 밥맛이 더 좋을까. 밥 한 그릇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다지 않던가.

후배가 눈 속에 핀 복수초 사진을 보내왔다. 이름만으로는 원수 갚는 꽃쯤으로 생각 되지만 복수초(福壽草)는 복(福)과 장수(長壽), 부유와 행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노란색의 꽃으로 봄의 전령사답게 얼음 속에서도 핀다하여 얼음새꽃이라고도 하고, 눈 속에서 피는 연꽃 같다 하여 설연화(雪蓮花), 황금색 술잔처럼 생겼다 하여 측금잔화(側金盞花), 새해 들어 가장 먼저 핀다 하여 원일초(元日草)라고도 한다. 복수초도 상사화처럼 꽃이 지고 나서야 잎이 나와서 꽃과 잎은 서로 못 만나는 꽃이란다. 한데 복수초 사진을 보며 봄이 왔구나 생각하니 어린 날 봄이면 친구들과 놀던 기억이 새삼 떠올라 아스라한 봄의 추억 속에 잠기게 된다.

먹을거리가 궁하던 때라 봄이면 주전버리 할 게 없나 눈을 희번덕이며 코를 벌름대며 찾곤 했다. 제일 먼저 찾아낸 것이 삐비라 부르던 띠의 꽃이었다. 그 여린 속살을 쏙 뽑아 입에 넣으면 달큰한 맛이 느껴지고 그 연한 감촉을 혀끝으로 맛보며 시합하듯 열심히 삐비를 뽑아 입에 넣었다. 한 줌 가득 모았다 한입에 넣고 씹으면 껌이 된다 해서 그렇게 해봤지만 어느새 살살 목구멍으로 넘어가버리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배고픔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먹을거리라는 것만으로도 우린 그저 좋았고 또 그것을 놀이처럼 즐겼던 것 같다. 그러다가 그렇게 찾아도 안 보여 뽑아먹지 못했던 삐비꽃이 어느 날 요건 몰랐지 하며 하얗게 피어오르면 괜히 심통이 나 작은 돌멩이들을 걷어차며 성깔을 부렸던 생각도 난다. 그러고 보면 어린 날의 봄소식은 배고픈 소식이었다. 겨우내 먹던 고구마도 동이 나고 사방을 둘러봐도 먹을만한 것이라곤 없던 때 우린 여린 소나무 가지를 꺾어 겉껍질을 벗겨내고 나오는 속살과 대를 생키라하여 즐겨 먹곤 했었다. 하얀 속살 붙은 가지를 하모니카처럼 훑으며 빨아먹다 보면 입이고 손이고 송진이 말라붙어 끈적대곤 했지만 우린 그런 것도 아랑곳않고 먹는 데만 열심이었다.

얼마 전엔 깨복쟁이 친구가 봄동을 보내주어 먹으면서 고향 생각을 했는데 오늘은 복수초 사진을 보며 고향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왜 유독 봄만 되면 고향생각이 더 나는 걸까. 아마도 까맣게 죽은 듯 하던 대지에 초록빛 생명의 낌새들이 여기저기서 보이고 그러다 보니 유난히 배가 고팠던 그 시절에도 봄이 되면 무언가 먹을 것들이 생겨나겠구나 하는 희망이 먼저 생긴 때문이 아녔을까.

지금은 모든 게 넉넉하지만 그땐 그리 춥고 배고픈 때여서일까. 햇볕 내린 토담 밑에서 묵지빠를 하거나 구슬치기를 하던 그 시절이 봄소식으로 새삼 그리워지는 것은 군중 속의 외로움처럼 무언가 자꾸 잃어가고 있다는 서글픈 마음이 아닐까. 많이 있다고 넉넉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없어도 뭔가 가득함이 느껴지던 어린 날 이맘때쯤에서 삐비꽃 뽑아먹고 생키 훑어먹던 그리움으로 나는 봄소식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