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으로 이사를 한 후 10여 년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기다림과 설렘의 시간이었다. 이사를 결정하는 순간에는 황량한 텃밭이며 마당이며 장독대며 일감이 산재해있는 집으로 뛰어드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출퇴근에 문제가 없는 도심 속의 전원이었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어등산 줄기와 유유히 흘러가는 황룡강을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일이었다. 집 뒤편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눈으로 올라도 보고, 해 질 녘 자전거를 타고 황룡강변을 달리는 상상도 해보면서 미련 없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여유롭게 뜰 안 구석구석을 살펴봤더니 의외로 옹골진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앞마당 울타리에 건물 1층 높이의 동백이 서너 그루나 꽃봉오리를 터트리고 서 있고, 뒷마당과 옆 마당에는 감나무와 산벚, 꽃앵두, 자목련 등이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다 향나무와, 소나무, 호랑가시나무 등등의 상록수들을 제외하고도 벌거벗고 있어서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집 주변에 가득했다.

그렁저렁 해바라기 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 새 새봄과 함께 마술에라도 걸린 듯 온 집안이 떠들 썩 깨어나기 시작했다. 동백꽃을 선두로 꽃 먼저 피우기도 하고, 움과 싹을 틔우기도 하며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그중에서도 단단한 땅을 뚫고 뾰족뾰족 올라오는 새싹들의 출현에는 놀랍기만 했다. 금낭화, 작약, 글라디올러스, 원추리, 수선화 같은 뿌리식물들이 어두운 땅속에 몸을 묻고 있다가 기지개를 켜고 나오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되었으나 채송화, 과꽃, 봉숭아, 분꽃, 금잔화 같은 일년초들은 어인 일이란 말인가.

지난해 온갖 비바람을 이겨내며 살뜰하게 익힌 씨앗을, 또는 채 여물지도 못한 끝물들을 미아처럼 떨구고 다급하게 떠나야만 했을 그 광경이 자꾸만 눈앞에 맴돌았다. 문득 임신 중독으로 조산을 하여 겨우 1kg 남짓한 아기를 인큐베이터에 맡기고 전전긍긍하던 동생 생각이 났다. 품어 안고 젖을 물려가며 키워야 할 자식을 체온도 없는 기계 속에 넣어놓고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한없이 마음만 졸였었다.

차디찬 땅에 내던져져 겨우내 된바람, 된서리 모두 견뎌내고 연초록 고운 모습으로 고개를 내미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인 것만 같다. 맨몸으로 떨어져 누울 때 잠시나마 인큐베이터 역할이라도 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한데 고유한 그들의 질서에 개입하는 것 또한 인간 정서에서 바라본 배려이며 해석일 것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모든 탄생에는 간절한 꿈이 담겨 있어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 또한 희망이 담긴 값진 아픔이 아니겠는가.

해마다 나는 일년초들의 씨앗을 하나도 받아두지 않는다. 꽃이 진 자리에서 어김없이 새로운 꽃이 피어나듯이 지는 꽃 또한 내일을 안고 떠나리라는 그들의 순리를 굳게 믿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