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궁이에 불을 땐다. 연기로 제 몸을 동여맨 불길이 막막한 내일 같은 아랫목을 뜨끈하게 뎁혀주고 있다. 먹성이 좋은 아궁이는 불 맛이 입에 맞는지 타닥타닥 깨물고 있다. 차갑거나 뜨거운 아랫목의 자세를 결정하는 건 다들 장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불꽃을 피워 올리겠다는 아궁이의 생각이 집중돼야 아랫목의 자세는 뜨거워진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나는 한때 고등학생 신분으로 ‘19금 영화’ 보기에 열을 올린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한 친구로부터 에릭 시갈의 소설책 “러브 스토리”를 생일 선물로 받았다. 그날 밤 이 소설을 밤새워 읽었다. 어둠으로 게슴츠레 풀린 자정을 창밖에 던져놓고 책에 빠져들었다. 그 당시에는 학교 성적을 올리는 게 최대 과제였기에, 사랑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만난 사랑은 눈부시게 아름다워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잠과 하품의 활자가 가득해 눈꼽 낀 교과서와는 완전히 달랐다. 쫄깃한 심장의 언어가 행간에서 흘러나와 낭만의 꽃이 폈다. 퇴적층처럼 켜켜이 쌓인 책장을 넘길 때마다 따스한 환상이 가득했다. 감동에 젖어 이 소설을 무려 네 번이나 더 읽었다. 그리고는 결심했다. 이 작품을 친구들이 읽도록 해야겠다고. 내 짝꿍부터 시작하여, 우리반 전체의 독서가 끝날 무렵, 옆반까지 그 독서를 권했다. 이게 흐름을 타, 11반까지 번졌다. 밤을 꼬박 샌 입소문은 힘이 쎄 자율학습 때도 교실을 들었다 놨다 했다. 낭만의 단맛을 맛본 청춘의 혀는 생기발랄해져 교실마다 왁자한 단내가 났다. 쉬는 시간이면 걸쭉한 입담의 복도는 달달한 사랑에 취해 입을 터느라 바빴다. 잔소리 많은 오후의 따가운 눈총에도 복도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시내 영화관에 영화 ‘러브 스토리’가 들어왔다. 하지만 19세 이하는 관람 불가였다. 나는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우선 우리반 애들에게, 옆반 뒷반 애들에게 그 항의 범위를 넓혀 갔다. 그런 다음에는 담임 선생님에게 항의했다. 바람의 숨을 차단한 아궁이처럼 선생님은 장작불 일 듯 타오르는 우리의 항의를 처음부터 외면했다. 선생님은 영화에 들떠 알록달록한 교실과 복도의 입을 지우고, 메마른 저녁의 문장일지라도 그것을 베껴 쓰고 암기하라며 호통쳤다. 차가운 아궁이의 생각 같은 외면 앞에서 영화 관람이라는 불꽃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애를 썼다. 국어 선생님을 비롯해 각 과목을 담당하는 선생님에게도 항의했다. 그래도 통하지 않자, 교감 선생님을 찾아가 직접 항의했다. 다행히 이게 효과가 있었다. 어느 날 아궁이의 뜨거운 마음이 모아져 아랫목이 따뜻해지듯, 영화 “러브 스토리”를 우리 학교 학생 모두 단체 관람하게 됐다. 불 맛이 좋아 탁, 탁, 탁, 소리 지르는 아궁이처럼 우리는 즐거운 비명을 내질렀다.

부지깽이로 나무 사이를 뒤적이며 불의 숨통을 연다. 아궁이의 뜨거운 기질은 편향적이기에 불꽃을 잘 관리해야 한다. 아궁이의 저 뚝심이 봄의 아랫목을 따스하게 해줄 것이다. 겨울에게는 관람 불가인 봄꽃이 피어나면 영화 ‘러브 스토리’처럼, 상춘객들은 봄의 따스한 아랫목 같은 단체 관람을 하러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