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롱하롱 꽃잎 흩날리는 봄볕 아래서 쑥을 캔다. 이맘때만 되면 봄 쑥 내음 따라 피어오르는 두 얼굴이 자꾸만 봄 동산으로 불러내곤 한다. 순임 언니와 미란 엄마.

윗집에 살던 순임 언니는 가족 다음으로 어린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다인 언니는 내가 학교에서 배워온 동요를 불러줄 때나 동화책을 읽어줄 때면 무척 즐거워했다. 잠을 자려고 누워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종종 언니 방문을 두드리곤 했는데 그런 밤이면 호롱불 밑에서 헝겊으로 인형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 주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신이 났던 것은 걸바구니 하나씩을 들고 봄 들녘으로 쑥을 캐러 다니던 일이었다. 언니의 쑥 캐는 솜씨는 대단했다. 내가 꽃과 나비에 팔려 초록색 이불이라도 깔아 놓은 듯한 청보리밭 둑을 몇 번 나풀거리고 나면 언니의 쑥 바구니는 어느새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는 겨우 바닥을 덮고 있는 내 바구니까지 차곡차곡 채워주었다. 쑥을 캐고 돌아온 날 밤이면 언니는 담 너머로 손짓해서 나를 불러냈다. 날아갈 듯 달려가 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쑥개떡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여고 1학년이 되던 봄날, 언니는 시집을 갔다. 그것도 집 마당에서 원삼 족두리를 쓰고 전통 혼례를 치렀다. 어찌어찌 축사의 임무가 내게 주어졌다. 결혼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언니가 내 곁에서 떠난다는 생각과 행복을 간절히 비는 마음만으로 축사를 읽어 나갔다. 목이 메어 울먹이는 나를 따라 신부의 얼굴도 눈물범벅이 되고 말았다. 그것으로 고향 산천에서 쑥을 캐는 일도 막을 내렸다.

도회지에 살면서도 봄만 되면 그 버릇이 도져 함께 쑥을 캐러 갈 사람들을 모으곤 했다. 미란 엄마 역시 그런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이다.

그날도 쑥을 캐러 다녀온 후였다. 봄비가 내리던 오후였는데 자기 집으로 빨리 건너와 보라는 미란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식탁에 앉자마자 구수하게 군침이 도는 쑥개떡 한 접시가 내 앞에 놓였다. 옛 살붙이라도 만난 듯 반가웠다. 소중한 추억을 입안 가득 달게 삼키고 있을 때, 진한 갈색의 커피가 날렵한 현대식 찻잔에 담겨 나왔다. 한곳에 나란히 자리 잡은 쑥개떡과 커피, 아무리 봐도 두 음식의 관계가 아이러니했다. 어떻든 우리는 먹고 마시고 웃는 사이 두 음식의 일맥상통한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각각 저만의 독특한 향기를 가졌다는 것을.

조금은 투박하지만 선한 심성으로 정을 베풀며 열심히 일하던 순임 언니는 고소하고 쫀득한 감칠맛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쑥개떡 같은 존재였다. 그에 비해 미란 엄마는 솔직하게 표현하면서도 매사에 현명하고 조화로운 처사가 품위 있는 찻잔의 커피 같은 여자였다.

지극히 대조적이지만 조금도 선후(先後) 없이 나란히 간직하고 싶은 두 사람. 이 봄이 가기 전에 두 여인을 향해 쑥 향기 가득 담은 봄 안부라도 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