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이 냄새는?

우체통에 우편물을 넣으러 가는데 좁은 길이라 무심코 누군가와 스쳤다. 그런데 쉽게 맡을 수 없는 냄새가 맡아진다. 스쳐 지나간 사람을 돌아보니 뒷모습이지만 여인네다. 시원한 모시 한복을 입었다. 요즘 같은 때에도 저런 옷을 입는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면서도 왜 그에게서 동백기름 냄새가 났을까, 동백기름 냄새가 나는 향수도 있는 것일까 몹시 궁금해졌다. 설마 동백기름을 쓰진 않았을 테고 그런 비슷한 향수를 썼겠다 싶어서였다.

동백기름 냄새는 내 나이쯤엔 그리움의 냄새요 향수(鄕愁)의 냄새다. 가을이면 동백을 주우러 다녔다. 학교에서는 교실 바닥을 동백기름으로 윤이 나게 했다. 그런 다음 날은 선생님들이 조심해야 할 날이다. 이쁜 여선생님이나 아이들에게 미운털(?) 박힌 선생님은 특히 조심해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교실로 들어오다 여지없이 꽈당하는 일은 우리 모두가 함께 공모한 일이곤 했다.

동백기름 하면 외할머니가 먼저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니 할머니는 머릿결이 참 좋으셨던 것 같다. 장엘 가시거나 나들이를 하실 땐 경대 앞에 앉아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고 비녀를 꽂았다. 참빗에 동백기름을 발라 빗질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비녀 꽂은 머리카락 위로도 동백기름을 살짝 발라주면 까만 머리에 윤기가 더해져 빛났다. 까맣던 머리가 하얗게 변한 후에도 할머니는 동백기름을 쓰셨다. 윤기 나는 할머니의 머리카락은 이모에게도 유전자로 전해 진 것 같다. 할머니는 막내이모의 머리카락이 탐스럽고 예쁘다며 늘 칭찬하셨고 자랑스러워도 하셨다. 사진 찍기가 쉽지 않던 그때 어느 날 아마 이모가 시집갈 날짜를 정해놓은 때였던가 보다. 산 넘어 사진관에 가서 머리만 나오게 뒷모습 사진을 찍으라 하셨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어린 날의 몇 장 안 되는 사진 속에 나는 정면으로 이모는 뒷모습으로 찍은 사진이 있다. 내가 예닐곱 살 때쯤인 것 같은데 흑백사진인데도 이모의 기다랗게 찰랑거리는 댕기머리는 참 정갈하고 내가 보기에도 고왔다.

동백기름은 밤에 등잔불을 밝히는 데도 썼다. 석유가 귀하던 때 등잔에는 동백기름으로 불을 밝혔다.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불빛 속에 심지 끝에서 톡톡 기름이 타며 내는 소리와 튀김 할 때 나던 고소한 냄새 같은 것이 방안을 채우던 그때가 새삼 그리워진다. 그런데 지금 스쳐 간 그분에게선 왜 동백기름 냄새가 난 걸까. 하얀 모시 적삼에 군청색 모시 치마는 앞 얼굴을 보지는 못 했지만 할머니의 모습을 닮지 않았을까 싶다.

어린 날 언젠가 크게 체한 적이 있다. 등을 두드려도 보고 별짓을 다 해 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한데 할머니가 눈 딱 감고 꿀꺽 삼키라며 숟가락 가득 노란 액체를 내밀었다. 동백기름이었다. 참으로 먹기에 거북스러웠다. 비위도 약한 난데 구역질이 날 만큼 끈적하게 넘어가는 이상한 맛이었다. 조금씩은 고소한데 많이 먹으니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걸 먹었더니 트림이 나오고 크게 트림을 한 번 하자 체한 것이 쑥 내려갔다. 동백기름은 그땐 가정상비약이기도 했다.

동백은 동아시아가 원산지로 12월에서 다음 해 4월까지 붉은색 흰색 분홍색으로 꽃을 피운다. 꽃말이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란다. 내가 좋아하던 고동주 수필가는 통영시 민선1.2기 시장이었다. 그의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동백의 씨>다. 부모도 없는 그가 입대 후 첫 휴가를 나와 찾아간 고향 섬마을, 유일한 의지인 숙부님조차 출타 중이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도 제대로 못 얻어먹은 채 귀대할 차비도 없이 배에 올랐는데 똑같은 처지인 어린 사촌 여동생이 동백 씨를 주워다 팔아 갚겠다며 얻어 온 여비를 떠난 배를 돌려 받아가는 눈물겨운 내용이다. 통영의 마스코트가 동백이다. 그는 시장 재임 때 내게 가로변에도 동백을 많이 심는다고 했었다. 그때 심은 것인지 언젠가 통영엘 갔더니 해변가로도 동백꽃이 피어있었다.

동백꽃은 봉오리째 툭 떨어진다. 여느 꽃과 지는 모양새가 달라 더 안타깝게도 보이고 당당히도 보인다. 뜻밖의 곳에서 동백기름 냄새를 맡다보니 새삼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눈부시게 까만 머리카락을 더욱 빛나게 하던 동백기름은 어쩌면 그 시절 할머니의 최고 호사품이었을 것 같다. 이번 가을엔 어디로든 꼭 동백 씨를 주우러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