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이(宣居怡) 장군의 정려(旌閭)가 있는 ‘도르뫼’. 마을을 에두르는 여러 산봉우리의 봉화대 신호를 한눈에 볼 수 있어서 한때 이곳은 병영(兵營)의 최적지였다. 바로 옆 동네에 고내상성(古內廂城)이 있었던 것을 보더라도 그 시절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장군의 정려 앞에 머리를 숙이니 늘 화두로 품고 살았던 인연의 신묘함에 골똘하게 빠져들었다. 한평생 거듭되는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의지대로 생을 펼치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세월에 떠밀려 무심하게 흘러가는 삶은 늘 허무를 남긴다.

틈만 나면 영원불변의 이치가 담긴 전설 속의 근원지를 찾아 나서고 싶었다. 지난봄, 그 들썩임이 결국 완도, 해남 일대로 발길을 이끌었다. 땅끝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쪽 바다는 아슴푸레한 눈빛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보길도에서는 ‘어부사시사’를 읊고 있는 윤선도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오는 듯했고, 울돌목으로 왜적의 배를 유인하는 이순신 장군의 우렁한 목소리도 귓전을 때렸다. 불과 13척의 배로 적을 초토화했던 명량대첩. 핵을 터트리겠다고 엄포를 놓는 세상에 있자니 어린 시절 고향 뒷동산에서 벌였던 전쟁놀이가 연상되기도 했지만, 명량대첩은 나라의 패망을 좌우했고, 병사들의 목숨을 건 단합은 충절의 굳은 의기(義氣)였다.

영웅 이순신 장군은 그렇게 탄생 되었다. 한데 그 그늘에 묻혀버린 많은 장군과 병사들이 있다. 전쟁터에서의 인연, 그것도 상생의 연으로 소중하게 맺어진 이순신과 선거이 장군. 선거이는 선조 20년 경흥부 녹둔도에서 이순신과 힘을 합해 여진족을 격퇴하였다. 이때 병사 이일이 모함하여 이순신을 죽이려 했을 때 선거이는 조정에 그 사실을 고해 무죄방면 시키기도 했다. 1596년에는 이순신의 수군과 한산도 앞바다에서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무찔렀다. 또한 선거이는 임진왜란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 부원수로 행주대첩에서 권율 장군과 합세하여 왜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적들은 날아다니는 것처럼 용맹하게 싸우는 선거이를 보고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렀다고 한다. 선조 31년 그는 울산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쟁터에서 평생 비장군(飛將軍)으로 살았던 선거이 장군. 그의 곁에는 가장 어려운 시대에 목숨을 걸고 함께한 이순신이 있었다. 그 인연의 끈으로 충무공이 그에게 지어준 시 한 수가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전쟁터에서 읊은 시, 모두가 엄두도 못 낼만큼 거대하게만 생각하는 충, 효, 의마저 그렇게 정이 흐르는 따뜻한 가슴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 하고(北去同動苦)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하는구나(南來共死生)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一杯今夜月)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 하겠구나(明日別離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