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해서 모처럼 선물 같은 시간의 호사를 누리고 있다. 늦은 아침, 잠에서 덜 깨어난 공기를 몰아내려는 듯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 바이젠’ 선율이 방안 구석구석의 먼지를 털어낸다. 파란만장한 인간 한평생을 펼쳐내는 듯 애잔한 슬픔 속에서 가슴 시린 아름다움이 피어나기도 하고, 숨이 잦아들 듯한 삶의 절규가 세월의 굽이굽이를 절묘하게 넘나들기도 한다.

여유가 주는 안온함 때문일까? 실과 바늘을 꺼내 들고 정갈한 마음으로 뜨개질을 한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해오던 일이니, 평생의 취미라고도 할 수 있다. 음악과 함께 나만의 공간에서 뜨개질을 하노라면 알 수 없는 상념들이 나래를 편다. 이런저런 인생사가 담긴 삶을 짜는 듯도 하고, 깜박 틀리게 짠 무늬를 수정할 때는 우리의 삶도 잘못된 곳을 풀어서 다시 짤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곡진하게 밀려올 때도 있다. 한 번 엮어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에 늘 추억이란 이름으로 마음 깊숙이 묻으며 회한에 사무치는지도 모른다.

뜨개 작품을 만들 때마다 용도에 맞는 색과 디자인을 고르는 데 고심을 한다. 커튼에는 시냇물이 흐르듯 연속무늬를, 식탁보엔 갖가지 꽃들을 새기고, 가전제품에는 비구상으로 배치하곤 한다. 탄생 되는 작품들은 사람들만큼이나 제각각의 얼굴을 하고 있다. 커튼이나 침대 커버 같은 대작(大作)도 있지만, 아주 작은 찻잔 받침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그중 먼 시선에서 바라보고 걸릴 때와 떼어 낼 때만 주인의 손길을 거치는 커튼보다는 향긋한 차를 마실 때마다 수시로 마음의 눈길이 머무는 작은 찻잔 받침이 사랑스러울 때가 많다.

어느 날이었던가. 짜다가 밀쳐놓은 탁자 보가 개구쟁이 아들아이 발에 걸려 질질 끌려간 적이 있다. 겨우 쫓아가 집어 들었더니 손가락 한 마디쯤은 이미 풀려 있었다. 한나절의 노고가 단숨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허탈한 마음으로 얽히고설킨 실뭉치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고향 마을 토담에 기대어 꺽꺽 흐느끼던 만복이 아재가 떠올랐다.

“뼈 빠지게 일했당게. 그 논이 어떤 논인디….”

없는 집에서 태어나 머슴살이, 품팔이로 소처럼 일해서 마련한 ‘비암들’ 논 네 마지기를 노름꾼 건달 형님이 긴 겨울 하룻밤에 날려버렸다. 인고의 반평생이 아이의 발에 걸려 풀린 실뭉치가 되어버렸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짜고 있을까. 또한 어떤 용도의 작품일까. 제법 많은 세월을 이리저리 종횡으로 쉬지 않고 엮었음에도 도무지 모르겠다. 많이 늦었지만, 바늘과 실을 놓아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올 한 올 심혈을 기울이고 싶다. 소품일 것은 분명하나 무늬마다 정성을 담고 간절한 소망을 심을 때 나만의 특별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 올이 선 듯 바르기만 하고 영혼과 감성이 없는 무늬는 싫다. 비뚤배뚤 볼품없지만 소소한 삶의 흔적이 배어나는 그런 작품을 위해 오늘도 고운 선율의 음악도 듣고, 솔바람 사이로 두둥실 뭉게구름 떠가는 하늘도 본다. 내 인생의 뜨개질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