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란 말만으로도 아련해진다. 추억이란 말에선 먼저 그리움 내가 물씬 풍긴다. 거기다 맛을 붙여 추억의 맛이라 되뇌어 보면 나도 몰래 군침이 돌거나 신맛이 느껴진다. 말이 주는 느낌은 이리도 강하고 생경하다. 한데 갑자기 웬 추억이고 맛인가.

며칠 전 내 고향 나주를 잠깐 들렀었다. 거기서 오랜만에 맛본 나주곰탕 맛은 그 맑은 국물 맛을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혼자만 맛있게 먹고 온 것도 걸리고 아내에게도 그 맛을 보여주고도 싶었다. 전화 주문을 했더니 오늘 도착해서 아내와 그걸로 저녁을 먹었다. 아내는 맛있다 하는데 사실 나는 그곳에서 먹었을 때만은 못 했다. 하지만 그 맑은 국물 맛만은 역시 그 맛이었다.

사람들은 추억을 끄집어내어 향수에 젖곤 한다. 내게도 하얀 무명 두루마기에 지팡이를 짚고 장에 다녀오시거나 먼 외출에서 돌아오시던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니다.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주실까 기대하던 순간이 더 떠오른다. 하루 종일 빨아먹어도 다 먹지 못한다는 십 리 사탕은 입에 물면 입을 오므릴 수도 없을 만큼 어린 내겐 컸다. 그렇다고 그걸 깨트리거나 입에서 빼내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할머니가 가끔 해주시던 빵떡도 생각난다. 솥뚜껑 위에 달걀 섞은 밀가루 반죽을 풀어 만든 떡이라면 떡이고 빵이라면 빵인 커다란 것을 삼각꼴로 8등분하여 손에 쥐어주던 그 맛도 잊지 못한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맛있는 건 아녔을 텐데도 내게는 특별히 기억나는 간식이다. 우리 스스로 해결한 것도 많았다. 봄이면 삐비를 뽑거나 싱아를 꺾거나 찔레를 먹기도 했다. 생키라고 해서 여린 소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기고 단물을 핥아먹기도 했다. 눈물이 날 만큼 신 싱아를 저절로 감겨 지는 눈을 반쯤 감고 먹으면서 서로 반만 뜬 눈끼리 마주치던 어린 날의 동화는 그냥 행복하면서도 슬프도록 아름답게 남아있다. 그런 날 삐비를 뽑아 한 움큼을 입에 넣고 껌을 만들겠다며 열심히 질겅질겅 씹어댔지만 우리는 학교가 끝난 후의 허기가 그것을 삼켜버리는 것까진 막진 못했다.

어찌 생각하면 요즘처럼 넉넉지 못해서 더 아련하고 그래서 더 오래 생각나는 서럽도록 행복한 어린 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삼십 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중학교에 다닐 때 집으로 오다 뽑아먹은 무 하나 때문에 다음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다리가 터지도록 얻어맞았다. 그런데도 매운맛 단맛 그때의 무맛은 잊을 수가 없고 그래선지 그 일은 지금에도 그냥 즐거운 그리움이다. 그러고 보면 추억의 맛은 아픈 맛 슬픈 맛 안타까운 맛인 것 같다. 없어서 모자라서 겪었던 슬픈 경험들이 풍요의 이 시대엔 그리움이 된다니 이 역설을 어찌 해석해야 하나.

아랫녘 사는 후배가 불량식품이라는 옛날 과자를 한 상자나 보내왔다. 옛날 생각을 하며 군것질 하란다. 하지만 그땐 그리도 맛이 있었는데 내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만 골라 보내왔는데도 입맛이 그리 당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느새 야금야금 반은 먹은 것 같다. 새삼 배고프던 시절의 맛에 나도 몰래 가슴이 싸해진다. 그렇게 추억도 맛도 그리움이 되는가.

손녀들이 오면 아이스크림 집엘 간다. 아이들은 자기 좋아하는 맛을 찾아 이것저것 요구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만큼 맛을 모른다. 아니 그들이 좋아하는 맛을 내가 좇아 가질 못 한다. 여러 가지 맛이 아닌 한 가지 맛만으로도 숨이 멎을 만큼 벅차게 감격하던 어린 날의 먹거리들엔 그래서 짠 눈물 같은 맛으로 그리움이라 불려진다. “할아버지, 이거 좀 맛보세요!” 손녀가 내미는 작은 스푼 채 받아먹으면서도 어린 날의 그 시디신 싱아 맛만큼 상큼한 맛과 마음이 되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이 옛날 사람인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여러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보다 맛없는 옛것에 추억의 맛이니 그리움의 맛이니 하는 내가 참 궁상맞다. 그래도 어쩔 건가. 이런 나인 것을. 그땐 그 맛이 분명 더 좋았던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