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소설이 지났다. 소설이 되면 땅이 얼기 시작하고 겨울 기운이 돈다고 한다. 소설이 지나고 나니 어느 새 겨울 문턱을 넘어선 나뭇잎들이 군데군데 쌓여 가고 있다. 치명적으로 더웠던 올 여름이 끝날 것 같지 않아 내심 걱정이었다. 그런데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옷깃을 여미고 있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절기에 대한 선조들의 지혜에 한없이 겸허해진다.

사람들의 옷이 가을을 건너 띈 듯 두툼해졌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달리는 러너들이나 반려 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이들의 숫자도 확연히 줄었다. 그래도 산책을 포기할 수 없는 나는 아침이면 장갑까지 끼고 동네의 가로수 길을 걷는다. 이울어지고 있는 가을을 온전히 누리기에 그만이다. 걷다보면 은행나무가 즐비한 길을 마주한다. 밤새 누가 황금 융단이라도 깔아 놓고 갔는지 그 황홀함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나는 순간 물아일체가 되어 한참을 머물러 있다. 내 안의 동심이 불쑥 올라와 드러눕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다시 걷는다. 나와 같은 마음을 가졌을 몇 사람이 총총 앞서 걸어간다.

지난 주말 저녁이었다.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 오랜만에 배달의 민족에서 시켜 먹기로 했다. 주문을 하자마자 벨소리가 들렸다. 딱히 올 사람이 없어 벨소리를 무시했다. 안에서 반응이 없자 누군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두드렸다. 똑똑. 똑똑. 아무리 우리가 빨리 빨리 민족이라 해도 음식이 벌써왔나 싶어 문을 열고 나갔다. 음식 대신 서른 남짓한 낯선 여자가 얼굴에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그녀는 조금 쑥스러운 듯 두 손으로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두 손 보다 더 공손한 말투로 엊그제 이사 온 101호라며 잘 부탁드린다고 한다. 아 예 하며 얼떨결에 비닐봉지를 받아 들고 고개 숙여 잘 가라는 인사를 한 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사 떡이었다. 이사 떡이라니 참 오랜만에 만난 풍경이라 낯설기까지 했다. 어쨌든 배고픈데 잘되었다 싶어 받아든 비닐봉지 속 떡을 꺼냈다. 떡과 함께 편지가 있었다. 나는 떡은 저 만치 밀쳐놓고 편지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손 글씨도 아니고 긴 문장도 아닌 몇 글자 안 되는 편지 아니 쪽지는 내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었다. 나는 그 이웃의 정이 듬뿍 담긴 쪽지를 그냥 버릴 수 없었다. 눈에 잘 띄게 냉장고에 붙여 두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까지는 아니어도 놀라웠다. 요즘도 이사 왔다고 떡을 돌리는 사람이 있구나. 이 얼마나 오랜만에 만나는 정인가. 세상이 아무리 팍팍해졌다 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은 따뜻한 구석이 많다 싶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 날 우연히 관리사무실 소장님을 만났다. 이사 떡에 대한 얘기를 했더니 101호가 관리사무실 뿐 아니라 경로당까지 떡을 돌렸다고 한다. 요즘 참 보기 드문 젊은이라며 우리는 맞장구를 쳤다. 먼저 좋은 이웃이 되겠다며 떡을 돌리는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어깨가 움츠러들지만 절로 가슴이 쫙 펴지지 않은가.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다. 언제부턴가 이 말이 휘발된 지 오래다. 아니 요즘은 이웃사촌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나 찾아야 될지도 모른다. 이웃끼리 사소한 일로 (물론 당사자에게는 사소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서로 얼굴 붉히다가 고성이 오가고 난투극까지 하다 결국에는 사람이 죽어가는 경우도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으니 이웃이란 말이 무색하다.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려울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고, 좋은 일은 나누어야 마땅한 것을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누굴 탓하겠는가. 너도 나도 우리 모두의 책임이 분명하다. 그나마 정이란 것을 느꼈던 우리 어른 세대가 미래 세대에게 그 따뜻한 정을 잘 넘겨주지 못했으니 미안함은 어른들의 몫이다. 부끄럽지만 이제 부터라도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겠다는 자세로 살아간다면 여기 저기 좋은 이웃들이 생겨나리라 믿으며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안녕하세요.

103동 101호에 이사 왔습니다.

좋은 이웃이 되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103동 101호 드림

저도 좋은 이웃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