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면 어디를 가더라도 우거진 신록을 볼 수 있어 좋다. 낭창낭창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초록 잎들의 요염한 자태와 등을 타고 흐르는 땀을 씻어주는 산들바람은 서둘러 가는 걸음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디 아름드리나무뿐이겠는가. 발길에 닿는 모든 것마다 나 여기 있다고 사락사락 아우성치며 손짓하는데, 마치 그 모습이 오케스트라의 하모니처럼 아름답게 들린다. 연주하는 중에도 어떤 녀석은 바람결에 몸을 흔들며 유혹하기도 한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현란한 몸짓에 눈길을 빼앗긴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넋을 놓고 바라보다 저려오는 오금과 쏟아지는 햇볕이 따끔거려 어쩔 수 없이 일어나지만 때론 종일토록 바라보다가 초록으로 물들고 싶은 황홀한 유월이 지금 흐르고 있다.

언제부턴가 동네마다 좋은 산책로가 많이 생겨났다. 필요에 의해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지는 것이야 당연지사다. 우리 동네도 여러 아파트 단지를 에워싼 둘레길이 생겼다. 야산까지는 아니어도 야트막한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이 있어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평지로 이루어진 공원이나 근처 대학캠퍼스를 걷는 것보다 제법 운동도 되는 것 같고 지루하지 않아 좋다. 그래서 나는 종종 그 둘레길을 찾는다. 걷다 보면 푸른 초장이 펼쳐지기도 하고,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힘든 오솔길도 나온다. 맨발걷기를 할 수 있게 만들어진 커다란 황토 웅덩이도 있다. 사람키만한 싸리 빗자루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당연히 사람들도 간간히 보인다. 그를 만난 것도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였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빠르게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이전과 달리 요즘은 오다가다 마주쳐도 그냥 지나치기 다반사인데 오랜만에 건네 오는 인사에 나도 안녕하세요 하며 돌아보았다. 예상과 달리 외국인이었다. 그는 한국에 온 지 2년 된 캐나다인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가족은 모두 토론토에 있으며 광주에 있는 S전자에서 일하러 혼자 한국에 왔단다. 그는 가던 길을 잠깐 멈춰 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쪽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쪽지에는 영어로 John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전화번호가 있었다. 쪽지를 보고 의아해하는 내게 그는 전화 해 우리 친구해 하는 것이다.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셔 하고 덧붙이길래 나는 엉겁결에 알겠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앞으로 나가다말고 뒤돌아보며 꼭 전화 해 하는 것이다. 먼 이국에서 얼마나 외로웠으면 처음 본 사람에게 전화번호를 주며 전화하라고 했을까. 그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물론 그 쪽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누르지는 않았다. 차마 버리지는 못했으니 지금도 책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그 쪽지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지난 해 파리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파리의 이른 아침 풍경도 이곳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청소차들이 먼저 움직이고, 그 뒤로 가볍게 뛰는 러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나는 딸아이와 함께 SNS를 통해 검색해 둔 커피 맛집을 찾아 갔다. 파리 8구쯤으로 기억한다. 근처에 대학교가 있는 아주 작은 카페였다. 카페에 도착한 우리는 두 번 놀랐다. 먼저 카페가 너무 작았고, 또 그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몇 사람이나 줄서 있었다. 순서가 되어 주인에게 주문을 하려는데 갈색 머리 프랑스 여인이 안녕하세요 하는게 아닌가. 우리는 너무 놀랐다. 우리가 한국사람 인걸 어떻게 알았냐며 반갑게 물었더니 소곤대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도 한국외대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한 적이 있고, 한 달 후에 다시 한국을 여행할 것이며 한국을 정말 좋아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짧은 대화를 옆에서 듣던 한 프랑스인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나섰다. 서울에 오면 꼭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왔지만 그 후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셋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가끔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날의 느낌을 회상하고 있다.

요즘 어디를 가더라도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이들이 자주 눈에 띈다. 마주 오는 사람 대신 스마트폰과 인사하며 걷는 것이다. 하긴 한 아파트에서 살면서 마주쳐도 서로 모른척하는 세상이니 산책로에서 인사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인사만 잘해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나부터라도 산책로에서 만나는 사람이든 아파트에서 만나는 이웃이든 따뜻한 인사를 먼저 건네야겠다. 안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