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의 한 문학 모임에서였다. 오늘의 일본 문학계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명으로 평가받는 다카하시 무쓰오(高橋睦郞,1937~)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유라시아 끝자락이자 출발점인 일본에서 왔다고 했다. 흔히 우리가 고립된 섬나라라고 생각하기 쉬운 일본이 유럽과 아시아를 아울러 이르는 이름인 유라시아(Eurasia)의 일원이라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뭔가에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지금껏 우리가 지형적으로 한중일로 표현되는 유교문화권 또는 이른바 극동아시아권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과연 한국의 어떤 작가가 과연 발트해로부터 오호츠크해에 이르는 툰드라 지대 또는 아한대성(亞寒帶性) 침엽수림과 초원의 혼성 지대에 자신들의 문학적 뿌리를 두고 있는가 새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동서양을 오가는 활달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의 시를 보여주는 다카하시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일본과 달리 한반도야말로 지구 표면을 구성하는 지각판의 하나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포함하는 '유라시아판''에 속한다. 특히 한민족의 경우 국경과 민족 간의 경계가 불분명했던 고대로 올라갈수록 강이나 호수 주변을 제외하고는 거의 나무가 없이 풀만 자라는 평야를 의미하는 스텝(Steppe)지대에 의지했던 유목민 문화에 크게 영향 받았을 게 틀림없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모든 문명의 흥기(興起)와 쇠망은 어떤 식으로든 스텝지대를 통한 초원길과 그 뒤를 잇는 '비단길'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컨대 고구려 고분벽화나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적들이 그 증거다. 단적으로 그 유물들은 한반도의 문명이 이미 오래전부터 북방 유라시아 민족들과의 무역과 인적 교류를 통해 성장하고 발전해 왔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이동 통로로서 이러한 교역로들이 항시 평화롭고 바람직하게 작용해온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역대의 전쟁과 침략이 유라시아권 정치세력의 지형의 변동과 맞물려 있었으며, 그 결과 자칫 피비린 전쟁과 학살을 부르거나 제국주의적 문화침략으로 이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유라시아 대륙의 한 모퉁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전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그렇듯 이른바 세계화 시대에도 하나의 대륙으로 묶여 있는 유라시아엔 서로 다른 이념과 종교로 인한 민족과 국가 간의 갈등과 대립의 불씨가 여전하다. 특히 근대에 들어서면서 순전히 인간의 편의와 이익을 위한 무분별한 개발과 간척 등으로 인해 '새'를 비롯한 동물의 이동통로이나 서식지가 마구 파헤친 바 있다.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우린 인간만이 이 지구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도리어 온갖 유적의 존재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 왔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유라시안을 자처하는 다카하시 마쓰오의 인사말에서 촉발된 '새의 길'에 대한 나의 상상력은 여기에 기반하고 있다. 언제든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문득 나는 이제 유라시아를 넘어 호주나 아프리카 대륙 사이를 자유로이 횡단하는 '새의 길(Bird road)'에 대한 대담한 상상력을 펼쳐본다. 아니, 일개 시인으로서 나는 사람과 사물, 만물과 우주 사이의 공공영역으로서 지렁이 등 저마다 고유한 독자성과 자유를 가진 모든 '생명의 길'에 대한 구상과 도래에 대한 예감에 휩싸여 있다.

역설적이나마 하나의 재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인류가 겪고 있는 예측불가능한 자연의 힘을 새삼 일깨우고 있는 연속적인 기후 난동 속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