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기후 위기의 결과라니 마음이 더 무겁게 다가온다. 금년만이 아니라 해마다 여름이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힘들게 하는 것은 불볕더위만이 아니다. 나라 밖으로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갈등이 전쟁 양상으로까지 악화하고 있고, 한반도에서는 남북 간의 대치가 심상치 않다. 정치권의 극한적인 싸움도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주식 시장의 큰 변동성도 향후 경제 사정의 우울한 예고치 같다. 여러 가지로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는 계절이다.

이런 답답한 시절에 그래도 우리의 마음에 위로와 즐거움을 안겨주는 일이 있어 다행이다. 파리에서 전해지는 우리나라 올림픽 선수들의 승전보와 선수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 주인공이다. 8월 6일 기준으로 우리나라 올림픽 메달 성적이 세계 6위권이다. 경기가 아직 많이 남았지만 지금 추세로 볼 때 파리 올림픽 성적표가 적어도 10위 이내에 속할 것 같다. 10위 이내에 속한 나라들을 보면 미국, 중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대한민국, 일본,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 모두 경제 선진국이나 강대국이다.

올림픽 성적의 기본은 선수 개개인의 피나는 노력과 역량이지만, 그 뒤에는 국가의 뒷받침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과거 우리가 어려운 시절에 스포츠에서 유독 좋은 성적을 거둔 예도 있었다. 그때는 한편으로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과도한 스파르타식 훈련과 통제국가의 성적표라는 생각이 들어 다소 찜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메달 상위권 성적이 좀 더 편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와 진다. 우리의 국력에 어울리는 성적표라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가 획득한 금메달 내용에서 흥미로운 상상을 해본다. 6일 현재 우리가 획득한 금메달 11개 중 양궁이 5개, 사격이 3개, 펜싱이 2개 등 세 종류 종목에서 거둔 금메달 숫자가 10개나 된다. 양궁은 활, 사격은 총, 펜싱은 칼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모두 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무기들이다. 강대국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며 선진국가를 건설한 우리의 힘들면서도 자랑스러운 역사와 활·칼·총이 가져다준 메달 성적을 연결지어 보는 것은 순전히 필자만의 생각일까.

올림픽 선수들이 무더위를 식히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선물한 메달 숫자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 정상에 오르기까지 그들이 살아온 가슴 뭉클한 인생 스토리나 경기장에서 보여준 멋진 스포츠 정신, 그리고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귀여운 세리머니 등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즐겁게 해준다. 부상을 이겨내고 여자 단식 배드민턴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우리 고장 출신 안세영 선수의 멋진 투혼, 양궁에서 메달 세 개를 따면서 세계를 완벽하게 제패한 김호진 선수와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인 이우석 선수의 치열했던 양궁 개인 4강전 모습과 경기 후 두 사람의 위로와 축하를 건네는 모습, 탁구 개인 준결승전에서 동메달을 아깝게 놓친 신유빈 선수가 승자인 일본 선수 하야타에게 보낸 축하 인사, 유도에서 은메달을 딴 허미미 선수가 독립지사 허석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메달을 바치는 모습 등 우리 선수들이 남긴 흐뭇한 소식은 수없이 많다. 이런 아름다운 소식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불볕더위를 이겨내게 만들고 있다.

혼성 복식 탁구 시상식 자리에서 우리나라 임종훈 선수가 찍은 셀카 사진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은메달을 딴 북한의 리정식·김금용 선수와 동메달을 딴 남한의 임종훈·신유빈 선수가 금메달을 딴 외국 선수 등과 함께 다정하게 사진을 찍으며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모습 때문이다. 다른 종목과 달리 복싱은 준결승에 오른 3, 4위 선수에게 공동으로 동메달을 수여한다. 여자 복싱 54kg 경기에서 남한의 임애지 선수와 북한의 방철미 선수가 나란히 동메달을 땄다. 우선 두 선수가 동메달을 놓고 싸우지 않아 좋았다. 임애지 선수가 전한 바에 따르면 북한 복싱 선수 방철미는 8강전 경기 때 임애지 선수에게 '잘 싸우라(파이팅해라)'라고 격려했고, 임애지 선수는 함께 결승전에 올라가 금·은메달을 놓고 멋지게 겨뤄보자고 응답했다고 한다. 남북이 극단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 상황과 대비되는 남북한 올림픽 선수들의 이런 모습에서 위로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경기에는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만 존재할 수 없다.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에게는 축하를, 좌절의 아픔을 겪은 선수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이들 모두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젊은이들이고, 미래 사회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아름다운 행진이 2024년 여름 폭염을 이겨내는 일시적 청량제 역할에 머물지 않고, 대한민국을 더 건강하고 활기찬 나라로 만드는 정신적 청량제 역할로 승화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