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거기 있었다. 어린 날 동화처럼 들어왔던 전설을 지나 성서(聖書) 속 구절(句節)로만 만나던 그가 실존의 모습으로 내 눈앞에 보여졌다. 사실 그를 보러 오는 여정은 실로 만만치 않았다. 여행 5일째인 어제 아침 조지아로부터 아르메니아의 국경을 통과했다. 조지아에서 국경을 넘을 때는 몸만 통과 했지만 아르메니아에 입국하기 위해선 모든 짐과 함께 통과해야 했다. 우리나라 경상남북도만한 크기에 인구는 324만명이라는 아르메니아는 해외에 사는 70%가 자국을 돕는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하흐파트 수도원, 오후엔 해발 1,800미터의 반크 수도원과 그 옆 바다같은 세반호수를 본 후 예레반으로 이동 멀티 그랜드파라온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 호텔에선 내일 더 가까이 가서 볼 아라라트산이 가장 잘 보인다고 했다. 이곳 발코니에서 내일 아침이면 내가 그토록 보고자 한 아라라트산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가 마냥 가슴을 설레게 했다.

내 방은 아주 거창하게 대단한 호텔의 5층이다. 중앙에 큰 거실이 있고 양쪽으로 방이 배치되어 있고 발코니는 운동장이랄 만큼 컸다. 아라라트산은 어느 쪽일까. 나는 아라라트산을 아침 일찍 만날 기대 가득 잠을 청했다.

이윽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카메라를 들고 발코니로 나갔다. 그런데 정작 아라라트산을 찾을 수가 없다. 안개 속에 숨어 있는 멀고 가까운 산들이 저마다 제가 아라라트산이라는 것만 같다. 내가 잘못 알고 있나 싶어 자료집을 꺼내 확인한 후 그의 모습을 다시 찾아보았다.

드디어 어렴풋이나마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년설로 덮여있는 5,165m의 어머니(대) 아라라트산과 3,896m의 아들(소) 아라라트산까지 가려진 구름 속에서나마 윤곽을 볼 수 있었다. 아니다. 소 아라라트산은 비교적 형체를 잘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 아라라트산의 윗부분은 구름에 가려 중간 부분만 겨우 볼 수 있었다. 오늘 오전에 좀 더 가까이 간다는 그땐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참으로 먼 길을 돌아서 그를 보고자 왔는데도 그는 수줍음쟁이인지 신비의 구름만 두르고 자신을 가린 채 모습을 숨기고 있다. 혹시 내게는 보여주기 싫다는 것인가. 궁금함을 묻어두고 한밤을 기다린 이 아침에도 아주 조금만 그것도 얼굴은 감추고 몸만 살짝 내보이는 것이 얄밉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니 멈춰있던 구름이 한순간 조금 비켜나고 하얀 설산의 얼굴이 아주 서서히 드러난다. 그를 보기 위해 특별히 택했던 멀티그랜드파라온호텔에서 5,165미터 높이의 신비하고 경이로운 모습을 비로소 접견한다. 그러나 여전히 성은 차지 않는다. 좀 더 선명하게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라라트산은 성경 창세기에서 죄악으로 넘치는 세상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명하셨고 노아의 가족 여덟 식구와 각종 동물 한 쌍씩만 방주로 들이게 했다. 그 후 40일 밤낮을 비가 내리게 하여 온 세상이 물에 잠기게 해서 모든 것을 다 멸하셨다. 150일 후에야 물이 빠지게 되었을 때 노아의 방주가 머무른 곳이 바로 이 아라라트산인 것이다. 성서를 신화적 이야기로 생각해 버릴 수도 있는 현대인에게 아라라트산은 실제적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인 것이다. 크리스천인 내게도 믿음의 한 실체를 확인하는 만큼 눈으로 보는 아라라트산은 성서 속 증거를 확인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아침을 먹고 그를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아라라트 평야에 있는 코르비랍의 성 그레고리 지하감옥이 있는 수도원으로 향했다. 가면서 멀리로 보니 포크르베디 언덕에 레고 블럭처럼 보이는 수도원과 그 뒤로 배경처럼 펼쳐진 아라라트산이 여전히 신비로움은 영원히 신비로워야 한다고 말하는 듯 했다. 하지만 거리상으론 가까워지긴 했으나 아라라트산은 호텔에서 바라보던 모습만도 못하게 안개 속에 여전히 숨어 있었다. 카메라에 그 모습이라도 더 담고자 셔터를 누르면서도 몇 번을 혹시나 하고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여러 사진에서 보았던 그런 선명한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 눈으로 아라라트산을 보았다는 것 자체는 커다란 감격으로 나를 감동케 했다. 그래서인가. 그레고리가 13년이나 갇혀 지냈다는 지하감옥이나 바실리카 양식의 성그레고르 교회나 성벽 높이가 6-8m나 되고 두께도 2-3m나 된다는 대단한 성채에도 마음은 가지 않고 내가 처음부터 목적했던 아라라트산을 더 선명하게 보지 못한 것만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위안이 된 것은 맞다. 그는 분명 거기 있었고, 나는 그에게로 가서 직접 그를 본 것이라는 확실한 사실이 흥분처럼 감격으로 다가왔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부터 그를 멀리서나마 만난 지금까지 나의 여정은 그로 인하여 분명 의미있고 오래도록 기억될 아름다운 길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