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도와 전남문화재단은 혁신적이고 참신한 문화예술창작 활동을 펼치는 문화 단체를 발굴지원하는 자율기획형(모두의 예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혁신적이고 참신한 문화예술 창작 활동 펼치는 문화단체를 발굴·지원하고 전남도민과 전남을 찾는 관광객을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등 사회적 이슈를 반영하거나 틀을 깬 창의적 예술작업을 통해 지역 예술계의 지평을 넓히고 지역소멸도 대응하고 있다.

올해 사업은 생태·환경, 소외지역 등 지역이 직면한 사회적 이슈를 예술적 관점에서 다루거나, 예술 창작 활동의 방향설정, 기획 및 실행 과정을 참여 주체들이 자율적으로 협의해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다원적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본지는 총 6회에 걸쳐 모두의 예술 사업을 지원받은 예술단체의 사업 현장을 찾은 문화 비평가들의 이야기를 게재한다



●다시 열린 시장, 해남 ‘우리들의 해방장’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세찬 비가 내리던 9월 어느 날. 해남에 장이 열린다고 해 발걸음을 옮겼다. 1일, 6일마다 열리는 해남장도 아니고, 이름부터 궁금증 한가득인 ‘우리들의 해방장’이란다. 어떤 장꾼들이 모여 있는지 질문을 한가득 안고 해남도서관에 도착했다. 비가 많이 내린 탓에 실내로 장터를 옮겼지만 예정대로라면 해남공원 일대를 오가는 사람들로 왁자지껄 채웠을 터. 해남읍내 일부 도로가 침수되기도 할 만큼 궂은 날씨였지만, 장터가 열리는 도서관으로만 들어서면 다른 세상이었다. 도서관 곳곳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들의 해방장’(이하 해방장)은 지역의 농산물과 먹거리, 손 작업자들의 소품 등을 파는 것은 물론, 예술과 놀이 활동을 더한 문화장터다. 2022년부터 시작한 해방장은 어느덧 3년차를 맞이했다. 지난해부터는 더 많은 주민들이 모이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져 전남문화재단 자율기획형 사업으로 장을 펼치고 있다. 두어 달에 한 번꼴로 사막의 신기루 같은 장을 여는 이들은 누구일까. 주식회사 일상판타지라는 문화예술단체로, 십여 년 전 해남에 내려온 정혜성씨(46)와 친구들이 해남읍에 자리한 커뮤니티 카페를 기반으로 영상제작, 아카이빙,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한다.

장터가 열리는 곳곳을 바쁘게 움직이는 정혜성씨를 붙잡고 잠시 이야길 나눴다. 해남에 내려와서 농사도 짓고 빵도 만들던 그녀는 “빵을 만들어서 장터에 내다 팔고, 그러다 다른 장터도 돌아다니면서 재밌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친구와 종종 나눴다고 한다. 그 무렵, 전남에는 해남 모실장을 포함해 장흥 마실장, 완도 장보고웃장, 곡성 오진장, 구례 콩장 등 귀농귀촌인들을 중심으로 직접 기른 농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정씨는 해남 모실장에 나와 빵을 만들어 팔았고, 좌판 위로 넘실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한 시장의 ‘참맛’에 폭 빠졌다. ‘모실’은 ‘마실’의 전라도 제땅말이다. 하지만 마실 가듯 장터를 향하던 장꾼들이 언제부턴가 코로나19로 더 이상 모일 수 없게 되었고, 오랜 쉼 끝에 ‘일상판타지’가 해남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담아내는 ‘해방장’이란 이름으로 다시금 장터를 펼치게 된 것이다.



●혼자가 아닌 여럿의 힘을 모아

“뭐라캐쌌노! 간 같은 소리 하네!”

장터 한켠에서 경상도 사투리의 찰진 소리가 들렸다. 삼삼오오 모여 한 곳을 응시하고 있길래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앉아본다. 한 이야기꾼이 ‘할머니의 용궁여행’(2020)을 읽어주고 있었다. 해남자원순환연구회 회원들이 ‘책을 읽어드려요’프로그램에서 어린이 환경 그림책을 맛깔나게 읽어주고 있는 풍경이었다. 올해의 해방장은 일상판타지를 주축으로 ‘해남씨_랩’, ‘해남자원순환연구회’, ‘청년로컬문화크리에이터연구소’와 협업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첫해는 일상판타지에서 뜻이 맞는 친구들과 자연스레 장을 열면서 해방장의 재개장을 알렸고, 2023년에는 전남문화재단과 함께 하면서 놀이 활동, 예술 공연을 더해 지역사회에 해방장이라는 이름을 알리는 데 주안점을 뒀다. 올해는 ‘혼자’가 아닌 ‘여럿이’ 힘을 보태는 장터를 만들었다.

세 가지 목표를 중심으로 해방장의 내실을 더하면서 밖으로 확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자 했다. 첫번째는 직접 재배한 농산물 등이 아니어도 오래된 물건, 쓰임을 다한 것을 다시 쓰는 벼룩시장 ‘나누장’을 확대해 누구나 장꾼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었다. 두 번째는 생태환경의 위기를 인식하고 장터 안에서부터 변화를 꾀하는 장으로 만들고자 환경 관련 프로그램을 배치했다.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물론이며, 어린이 환경그림대회, 플로깅 활동, 버려지는 자원 재활용·새활용 프로그램 등을 준비했다. 세 번째는 평범한 사람들을 공연 무대로 호명하는 것. 초등학교나 동아리 모임 등에서 딱 한번만 선보인 아쉬운 공연을 다시 선보일 수 있게 하는 열린 무대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호응이 꽤 좋았다고 한다.

해방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 외에도 해남 사람들이 모여 놀 수 있는 마당을 펼치는 것이 핵심이었다. 김 양식업을 하는 청년을 초대해 김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들어보고, 탐조 모임 회원을 초대해 해남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도요새 특징을 귀담아 듣기도 했다. 장구 치는 중년여성 동아리들을 위해 무대를 정비하고, 바닷가에 떠밀려오는 쓰레기로 전시도 열고, 아이들과 털실로 그물도 엮고, 바다 그림도 그렸다. 해남 사람들의 이야기로 장터를 채우며, 시장이 곧 문화공론장이 되는 순간을 경험하고 있었다.

올해는 그 경험을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하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협력은 늘 어려움이 따른다. 매우 구체적이어야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해방장에서의 협력도 어려움이 많이 따랐겠지만 이 과정 자체가 학습이 되고 여러 번의 학습을 거듭하며 해방장만의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혼자가 아닌 여럿의 힘을 믿는다. 빗줄기가 서서히 잦아들고 아직 만나지 못한 장꾼들을 만나러 서둘러 엉덩이를 뗐다.

여전히 도서관 곳곳으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9월 독서의 달을 맞이해 열리는 만큼, 책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준비한 장꾼들이 보였다. 훼손된 그림책을 가져와 새로운 팝업북을 만드는 ‘그림책 리사이클링 팝업북’체험부터 ‘책 쌓기 대항전’을 펼치는 가족 참여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책을 소중히 다루는 것 못지않게 책 자체를 놀이로 접하게 해주는 것도 아이들에게는 책에 대한 긍정의 경험이 될 터. 도서관 뒤편으로 향하니 ‘인생책방’을 열고 있는 장꾼들이 보였다. ‘나의 인생 책’을 소개하며 판매도 하는 곳이란다. 장꾼들 각자의 삶에 울림을 주었던 책을 소개하며 시끌벅적한 장터 한켠에서 개개인의 서사를 나누는 상상을 해본다. 홀로 카페에 앉아 조용히 읽는 책 말고, 가끔은 타인의 삶에 기대어 읽는 문장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인생책방’ 옆으로는 장터에 빼놓을 수 없는 맛있는 먹거리 장이 펼쳐졌다.

아침저녁으로 건강한 채소를 길러내는 손, 좋은 재료를 넣어 만든 빵을 정성스레 소개하는 시골 파티쉐의 말, 복잡한 단계를 거친 대형마트가 아닌 소작농의 직거래를 고집하는 소비자의 마음, 멀리서 땅끝 해남까지 내려와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주는 정은혜 작가의 마음. 해방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환대 덕분에 비 오는 장날 풍경이 내게 더 짙게 남았다.



●지역에 사람을 남기는 일

잠시, 나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도시가 아닌 내가 나고 자란 땅, 전남에서 살고 싶은 생각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 최근 가족과 함께 광주에서 구례로 삶터를 옮겼고, ‘지역’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숙제가 되었다. 이번 취재를 핑계로 일상판타지가 해남에서 하는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지역에서의 삶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2022년 처음 해방장을 준비하며 ‘일상에 활기를 삶에 영감을’이란 슬로건을 세웠습니다. 해방장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과의 작은 흐름을 만들어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 흐름을 만들려면 지역 내부와 외부의 적절한 자극을 통해 영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외부에서만 오면 가르치는 느낌이고, 둘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 고민입니다.” 정혜성씨는 함께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만들며 지역에서의 활동을 이어갈지 해방장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고민을 이어오고 있었다.

최근 전남 곳곳에서 지역에 기반한 문화예술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지역에 살고 있는 청년, 신중년들, 혹은 귀농귀촌한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유쾌한 작당을 모의하고 있다. 지역을 살리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없을 수 있다. 내가 그냥 좋아서 하는 일이기도 하고, 혹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지역에도 도움이 된다면 좋을 것이라는 약간의 선의가 들어간 활동일 수 있다. 곁에서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응원과 지지, 격려가 절대적이다. 1~2년 내 ‘소비’된 채 포기하거나, 서로 엮이지 못하고 개인으로 고립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해방장의 시작이 코로나가 끝나갈 무렵 친구들과 숨통 트일만한 재미난 일을 도모해보자는 것에서 시작한 것처럼, 처음부터 큰 의의를 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작이 동네와 동료에게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을 지켜봐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함께 고민할 것이 있으면 지혜를 나누고, 더디 갈 때는 잠깐 기다려주고, 힘에 부칠 때는 뒤에서 등도 밀어주며 말이다. 가끔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화를 식히게 해주는 좋은 어른도 있지 않았을까? 불쏘시개를 자처하며 해방장을 열고 있는 일상판타지와 ‘친구들’이 지치지 않는 동력을 스스로 갖고 있길 바란다.

안팎으로 인구 감소로 인한 지역의 위기를 논하는 요즘, 가끔은 ‘소멸’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이 위협적으로 들릴 때가 있다. 지역을 터전 삼아 사는 이들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위기감이 돌수록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는 이처럼 서로를 응원하며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역에 사람을 남기기 위해서 말이다.

11월에 열리는 마지막 해방장은 아이들이 가득할 것 같다. 학교에서 펼쳤던 학예회 공연을 한번 더 무대에 올려서 아쉬움을 해소할 수 있게 계획하고 있다니 말이다. 여전히 해방장은 해남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다. 가을 끝, 해남을 향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