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빛 양파가 동글동글 이쁘다. 설렘으로 발그레 화색이 돈 여인 같다. 양파는 순하고 둥근 성격을 지닌 것 같지만 한 성깔머리 한다. 벗겨지고 손이 닿는 게 싫어서일까. 겹겹의 속내를 매만질수록 눈물까지 흘리게 만드는 매운 향을 지니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순백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매운 염려를 안팎으로 단단히 여미기 위해서일까. 희고 둥근 방에 해맑은 표정만 들이지 않고 비수처럼 알싸하고 매운 혼잣말을 겹겹으로 들여놓은 양파. 어찌 보면 매운 향 같은 양파의 속임수는 노련하고 약삭빠르다. 아니, 알싸한 혼잣말이 날카롭고 아프다. 비 오는 날 그녀가 나에게 던진 한마디 말처럼.

대학 시절, 교회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면 내 곁을 지키며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여대생이 있었다. 대학은 다르지만 함께 활동했던 시간이 꽤나 많았다. 내가 연극 연출을 맡아 땀 흘릴 때면 곁에서 간식도 챙겨 주고, 때때로 배경 음악을 담당해 주기도 했다. 그녀는 항상 새콤달콤 단맛이 올라온 웃음을 자신의 입꼬리에 올려놓곤 했다. 웃음소리를 과식한 해 질 녘은 배가 불러 붉은 노을로 물들어 갔다. 달디단 웃음으로 몸집을 불린 오후가 따스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그녀를 나의 연인처럼 여겼다. 한 번도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 깊이 그녀는 내 사랑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하루는 예배드리러 교회로 가는 길이었다.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만난 우리는 다정히 눈인사를 나누었다. 차창 밖은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건방진 바람이 구름의 멱살을 잡아채 흔들었는지, 갈수록 빗줄기가 거세졌다. 쏴아쏴아, 하며 허공의 바닥에서 나뒹굴며 뒤엉키는 물의 폭력이 요란했다. 드디어 교회로 가는 길목에 버스가 정차했다. 버스 뒷문이 열리자 그녀가 먼저 내려 우산을 폈다. 우산은 물구나무서는 나팔꽃의 자세로 그녀의 손끝에서 활짝 피어났다. 우산이라는 나팔꽃 사원으로 어서 들어오라는 듯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톡톡톡 소리탑을 쌓고 있는 우산 속으로 들어가면 그녀와의 달달한 사랑이 완성될 것만 같았다. 나는 우산이 없던 터라,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녀의 우산 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때였다. 그녀는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나가 주세요. 우산 밖으로.”

나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우산 밖으로 나가달라니…’

엉거주춤 서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앞서 걸어갔다. 속내 가득한 흰 방을 매운 향으로 꽉꽉 채워 눈물 흘리게 하는 양파처럼 그녀는 나를 매몰차게 밀어냈다. 그녀는 환한 웃음의 저녁 그 어디에 비수 같은 독설을 숨겨두었던 것일까. 뻘쭘해진 나는 빗속을 냅다 뛰어 그녀 곁을 지나 교회 쪽으로 향했다.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 궁금한 우산 사건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나를 짝사랑했기에 교회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염려스러워 우산 밖으로 나가달라고 했단다. 그녀의 매운 염려도 모른 채 짝사랑하며 아파했던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녁밥을 준비하기 위해 양파 껍질을 벗긴다. 아파하며 먼 곳에서 달려온 속엣말을 벗긴다. 안과 밖이 한목소리로 이어지는 둥근 곡선, 그 짝사랑 같은 양파를 씻는다. 오해와 매운 염려로 겹쳐진 그날의 빗소리를 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