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책을 사니 안 사니, 보니 안 보니 해도 하루에도 수많은 책이 출판된다. 하지만 나오는 새 책만큼 버려지는 책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일주일에 한 번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면 나는 버릇처럼 버려지는 것들을 살펴보곤 한다. 책이 있나 없나를 보는 것이다. 주로 아이들 책이 대부분이지만 어떨 땐 오래된 전집류의 책들이 왕창 버려져 있기도 한다. 그런 걸 보면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해 진다. 버려진다는 것은 제 사명을 다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냥 처음부터 제 역할을 못 하다가 종내는 버려지는 슬픔을 당하는 것도 있다. 나도 집에 있는 책을 수시로 내보내고 있는 입장에서 그런 책을 들여올 수는 없다. 아까운 마음으로 내 딴엔 그걸 한쪽에 잘 보이게 해놓아 혹시 누군가 가져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지만 뒤돌아서면 금방 관리자가 쓰레기 더미 속으로 몰아넣어 버린다.

한때는 모 신문사가 ‘거실을 서재로’라는 캠페인을 벌인 적도 있었고, 또 한때는 번쩍번쩍 하는 최고 장정의 값비싼 책들을 거실 가득 꽂아놓는 것이 유행일 때도 있었다. 옛날엔 갖고 싶은 책을 월부로 사서 일 년 내내 할부금을 갚곤 했었다.

요즘 나는 책이 있는 공간을 찾아가곤 한다. 해서 엊그제는 청계천 헌책방골목을 가봤다. 한데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처참했다. 처참했다란 말 속엔 보기에도 안되었고 안타깝다는 내 심정이 포함돼있다. 수백 개가 넘던 책방은 다 없어지고 겨우 열일곱 개가 남았다는데 하나가 또 문을 닫는단다. 열여섯 개의 책방도 같이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띄엄띄엄 찾기도 힘들게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책방 앞 길가까지 책이 가득 쌓여있던 옛날의 헌책방이 아니라 아무리 봐도 하루에 한 명도 손님이 들어올 것 같지 않은 그야말로 사양길의 책방이었다.

주인이 내 나이쯤으로 되어 보이는 한 집에서 주인과 이야기를 해봤다. 지금 일흔두 살인데 딱 50년을 했단다. 여기서 벌어 자식들 다 학교 보내고 결혼도 시켰단다. 평생 한 일이 이것뿐이라 다른 것 해볼 엄두도 못 낸다고 했다. 요즘은 가게 세(貰)도 못 번단다. 그래도 나와 있어야 가게 보러 오는 사람도 만날 것 같고 어떻게든 권리금이라도 받고 접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빼곡히 쌓여있는 책더미 속에서 책 냄새와 함께 한 생을 산 사람이다.

책들을 둘러보았지만 옛날에 내가 찾던 희귀본이나 절판된 책도 안 보였다. 그럼에도 헌책들이 주는 그들만의 냄새는 그들만의 사연을 말하는 듯해 맨 아래쪽에 눌려있는 책들 쪽으로 자꾸 눈이 갔다. 예전 같으면 이것저것 욕심을 부려 한아름 책을 안고 나왔을 텐데 집에 있는 책들도 수시로 골라 내보내야 하는 안타까운 입장이라 마음을 겨우 누르고 나왔다.

내 서고엔 꽤 오래된 책들도 있다. 손으로 책장을 넘기면 종이가 부서져 열어보기도 겁나는 것들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책을 꺼내 냄새를 맡곤 한다. 옛 책에서만 맡을 수 있는 오래된 책의 향기는 그냥 냄새가 아니다.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들 손을 거쳐 내게로 오기까지 책의 내용뿐 아니라 보고 듣고 스쳐온 세상 이야기들이 책 냄새로 스며있기 때문이다.

연세 드신 문단의 몇 분께 안부 전화를 드린다. 하지만 대화가 잘 이뤄지지 못한다. 마치 오래된 책의 책장을 아주 조심스럽게 넘기듯 그렇게 대화한다. 너무 빛이 바래 잘 알아볼 수 없는 글자처럼 그분들 귀도 어두워져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당신 말씀만 오래 하시는데 발음이 어눌해서 나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해서 어림짐작으로 대화를 끝낸다.

불편하게 앉아 누군가 마지막을 정리해 줄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헌책방 주인의 몸에선 평생을 같이한 헌 책 냄새가 살냄새일 것만 같다. 그 쓸쓸하고 어둡던 헌책방의 풍경 속 오래된 책의 향기는 살아온 내 삶의 책 냄새와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오래전 그 청계천 헌책방에서 사 왔던 책들을 꺼내본다. 책 냄새를 맡아보며 그 시절 호황기도 추억해 본다. 오래된 책의 향기 같은 사람의 향기도 그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