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광주를 방문하는 분들이 있을 때나 가까이서 소그룹 모임장소가 필요할 때면 ‘동구인문학당’을 자주 찾는다. 마당 가득 햇살이 쏟아지는 옛집의 아늑함과 고요하고 단정한 한옥 마루가 온기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인문관 2층 레지던시홀에서 바라보는 무등산의 시원스런 초록 능선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곳이 번화한 도심 한가운데 시민들의 배움터로 열려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다.

1954년에 지어져 70년의 시간을 품은 그 옛집을 광주 동구청에서 리모델링하고 마당 한켠에 인문관과 공유부엌을 새로 지어 2022년 문을 열었다. 젊은이들의 핫플 동명동의 부족한 주차장을 늘릴 예정이었으나 시민들의 뜻에 따라 인문학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여기에 지역예술가들이 공공예술프로젝트를 진행해 공간을 기획했고 두 개의 지붕, 하나의 집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동구인문학당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누리는 예술공간, 모두의 집이 되었다.

실제로 여기서 청소년들과 지역의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생각모음단’ 활동을 해보았다. 인권과 문화다양성 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를 놓고 생각을 모으고 질문을 만들어 답을 찾아갔다. 산수동 굴다리 옛터와 농장다리를 걸으면서 푸른길에서 만나는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에 대해서도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폐선부지(78년간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기찻길이었다)를 초록숲으로 만든 시민들의 힘과 도심 속 녹지의 소중함에 대하여, 그 이면의 여러 제안과 의견, 갈등과 협력의 과정들도 빼놓을 수 없었다. 아시아 각국에서 일어난 갈등과 폭력, 저항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평화이야기보관소’ 프로그램으로 청소년들은 잠시 평화루트 개발자가 되어보기도 했다.

감성과 지성의 향연이 펼쳐지는 바로 그곳이 배움의 장소다. 나, 너,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고 바라보는 것, 가치와 태도와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야말로 인문학적 성찰이자 실천활동이다. 인문학당을 분주히 오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들, 지구를 살리는 식단을 실천하며 공유부엌을 오가는 어른들, 마당에서 펼쳐지는 작은 음악회와 추억의 베스트셀러 전시가 불러내는 일상예술의 일렁임을 바라보다 문득 ‘이 소리, 이 풍경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어져 있었던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선생은 ‘도서관적 시간’을 되찾자는 글을 남기셨다. ‘신자유주의적 시간’과 반대어로 “간단히 답을 얻을 수는 없는 깊은 질문에 침잠하면서 끝없는 문답에 몰두한다. 그 사고과정 자체가 풍요와 기쁨에 차 있다. 그것이 곧 ‘도서관적 시간’이다”라고 했다. 이 말씀에 빗대어 나는 ‘인문학적 시간’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다. 비용과 효과, 성과라는 잣대만 들이대는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기쁨, 자유로운 인격으로 자신을 형성해가는 기쁨”일 것이다. 이런 기쁨을 제공하는 장소가 도서관이고 인문학당이며 시민들의 배움터인 인문대학이자 평생학습공간일 터. ‘상징’과 ‘메시지’로서 인문도시를 넘어서 ‘실체’로서 인문도시를 체감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인문학적 시간’의 증거들이기 때문이다.

인문도시라는 상징과 실체 사이에 징검돌을 놓는 사람들이 있다. 일상에서 다채로운 인문활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이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다”는 말처럼 느슨하지만 다정하고 단단한 끈으로 이어진 사람들은 관계의 안전함 속에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간다.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토대를 만드는 일은 혐오와 폭력의 시대에서 나와 너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책정원’도서관에서 편안하게 책 읽는 시간, 이웃들에게 ‘올해의 책’을 건네는 용기, ‘동구인문대학’의 주제강연을 놓치지 않는 즐거움, ‘인문산책길’을 걸으며 숨 고르는 날들을 사는 것, 이것이 인문도시에 사는 시민의 행복일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 오는 6월 ‘동구 무등산 인문축제’가 펼쳐진다. 조약돌처럼 흩어져있던 인문학적 시간의 증거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인문의 숲은 어떤 모습일까.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품어주는 무등산을 닮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