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에서 처음 있는, 앞으로 계속하고 싶은 축제입니다. 아마 우리 주민들께서는 이런 경험을 처음 하신 거라 이런 세상도 있구나,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하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민들과 함께 신흥상회 마당에 잡초를 베어내고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신흥마을 강기순 이장은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감격의 눈물을 삼키며 지난 몇 주간을 회고했다. 한적한 이 농촌 마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곡성군 옥과면 무창리 신흥마을의 변신 이야기에 한번 귀기울여 보시라.



●‘스페이스 신흥상회-상상本色’

신흥마을은 여느 농촌 마을과 다르지 않게 고령화가 진행 중이고 빈집도 늘고 있다. 하지만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35가구의 구성원들이 흥이 많고 회의 문화가 잘 정착돼 있는 편이어서 어떤 일을 하자고 하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신나게 일을 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다 보니 ‘흥부자 마을관’, ‘한끼 100원의 식사’, ‘신흥마을 주민 일기장’, ‘신흥마을 유튜브 채널’ 등 이색적인 프로그램을 수행하면서 정부, 지자체로부터 여러 차례의 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마을에도 고민은 있었다. 10년 전만 해도 마을 문화의 중심 역할을 했던 신흥상회가 문을 닫은 뒤로 사람이 들락거리지 않자 폐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을회관 앞에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점방터(대지 160평, 건물 65평)가 흉가처럼 되어버렸으니, 제 아무리 ‘신흥’ 마을이라 하더라도 흥이 나다가 말 판이다.

이 암흑의 공간에 새로이 흥을 불어넣자며, 마을 공동체(이장 강기순)와 예술 단체(한국실험예술정신, 대표 김백기)가 뜻을 모았다. 신흥상회 소유주 홍봉기 씨는 공간을 무상으로 내어놓았고, 3년 뒤에는 마을에서 이 터를 매입할 수도 있게 됐다.

지난 8월, 신흥상회 공간을 문화적으로 재생하고 인근 골목길에 생기를 불어넣는 공동체 예술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이름하여 ‘스페이스 신흥상회-상상本色’!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여섯 명의 국내외 예술가들은 주민들 사이에 스며들어 이 마을이 보유한 문화적 자원과 요소들을 발굴하고 농가들 사이에 흩어져 있는 오브제를 활용해(고 한창기 선생이 늘상 말해왔던) ‘민예’를 선보이고자 했다. 마침내 10월 28일, 그 결과가 마을 회관 앞, 신흥상회 터에서 펼쳐졌다.

신흥마을 주민들이 마을회관 앞마당에 모여 앉아 행정가, 기획자, 예술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흥마을에 무슨 일이

결과 발표회에 앞서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누가 어디에 어떤 작품을 설치했는지 살펴봤다.

곡성 신기리에 작업실을 둔 서현호 작가는 마을 담벼락 여기저기에 작고 앙증맞은 테라코타 작품들을 설치했다. 담벼락 위에 합창하고 있는 어린이들을 세워놓기도 하고 담벼락 아래 풀이 자라는 곳에 애벌레를 올려두기도 하고 오래된 담벼락에 컬러풀한 생명체들을 풀어놓기도 했다.

특히 벽화 작업이 인상적이다. 대개 벽화작업은 오래된 담벼락에 페인트로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이미지를 얹기 십상인데, 서현호 작가는 시커먼 묵은 벽을 그대로 놔두고 그것을 긁어내면서 하얀 이미지들을 밝혀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시간이 지나도 색이 바래지 않을 뿐 아니라 다시 시커멓게 되더라도 다시 하얗게 긁어내면 된다. 이런 게 바로 발상의 전환 아닐까.

배철호, 박정근 작가는 신흥상회 건물을 ‘마을 갤러리’, ‘마을기록보관소’ 등으로 바꾸는 작업에 참여했다. 흉가가 다 된 집을 깨끗이 리모델링하고 동네에 흩어져 있는 농기구, 풍물 악기 등의 민예품들을 오브제 삼아 분위기 있는 전시 공간을 연출했다. 갤러리에서는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작가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76세의 농민 홍문채 씨이다. 대개 마을 갤러리라고 하면 마을 안팎에 사는 기성 작가들의 작품을 가져와 전시하거나 아니면 주민과 참여작가와 매칭이 되어 협업하게 마련인데, 신흥마을은 달랐다. 그냥 홍문채 씨 혼자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림을 그리는 주민들이 많고 솜씨도 빼어나서 주민들의 그림만으로도 계속 개인전을 이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마을’ 갤러리이다.

신흥상회 바깥으로 다시 나가보자. 헝가리 출신인 스자보 레카 작가는 굵은 대나무를 일정한 크기로 자르고 매달아서 한국의 전통적인 지붕 라인을 입체적으로 구현해냈다.

각진 콘크리트 건물 일색인 시골 마을에 멋진 한옥 곡선을 선물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온 스테파노 데보티 작가는 신흥상회 건물 옥상에 눈에 익은 페스트푸드점 로고를 큰 구조물로 설치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작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만남의 장소를 제공하고 싶었고, 혹시 젊은 사람들이 이 로고를 보고 오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다고 한다. 역시 이탈리아 출신인 데빗 스트루시아트 작가는 신흥상회 옥상에 엎드려서 마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큰곰 모양의 구조물을 설치했다. 누군가 아무도 없는 밤길을 혼자 걷더라도 항상 저 위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으면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세 작가는 모두 이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거나 버려진 재료들을 재활용해서 각자의 작품을 완성했다. 환경친화적이면서도 마을 친화적이기도 한 작업들이다.

마을 담벼락 여기저기에 설치된 테라코타 작품들.

●예술이 별건가요?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돌아 발표회장에 돌아오자 마을은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였다. 주민들은 마을회관 앞에 마련된 자리에 모여 앉았고 신흥상회 앞마당에서는 행정가, 기획자, 참여예술가들이 나와 그간의 이야기들을 주민들과 함께 나누었다.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도 있고 싱글벙글 계속 웃고 계시는 이도 있다. 참여 예술가들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그새 주민과 닮아진 소박한 사람들이다. 외국에서 참여한 예술가들은 하나 같이 마을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여기서 자기 고향 같이 지냈다고 회고한다. 축하공연을 앞두고 김백기 총감독이 이야기를 맺는다.

“사실 예술이라는 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경험을 많이 하지 않다 보니까 좀 덜 익숙한 겁니다. 여러분들 이제 늘 여기서 이 작품들을 보다 익숙해질 거예요. 그게 예술인 거죠. 예술가는 여러분들을 더 행복하게 해주고 더 기분 좋게 해주려고 하는 사람들이고요. 곡성은 공장이나 어떤 현대적인 시설들이 없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이 자연과 어우러진 문화예술이 앞으로 곡성에 굉장히 중요한 콘텐츠가 될 것입니다. 충분히 가능해요. 마을마다 이렇게 한 군데씩 이런 공간들이 있다면 주민들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이런 마을들이 앞으로 좀 계속 곡성에서 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자, 준비됐나요?”



●터무늬 피어나는 신흥마을을 향해

공동체 예술(community art)는 장소성에 기반한 협업 예술이다. 위치와 장소는 뜻이 다르다. 위치(site)가 단순히 지도상의 어떤 좌표, 중성적인 ‘곳’을 뜻한다면, 장소(place)는 놀이터, 배움터, 일터, 집터 들이 말하고 있는 ‘터’, 삶의 터전을 뜻한다. 영어로 ‘무슨 일이 일어나다’라고 말할 때 어떤 ‘장소를 얻다(to take place)’라고 표현하는 까닭이다. 장소(터)에서는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그래서 이야기가 지어지며 그렇게 기억이 머문다. 그런 기억이 쌓이고 쌓여 이야기가 두메를 이루게 되면, 사람들은 그때 그 터의 무늬를 알아본다.

공동체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 터무늬이다. 이것은 행정가의 것도 아니고 참여작가의 것도 아니고 오직 그 공동체 구성원들, 한마디로 주민들의 것이다. 주민들이 주체로 나서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작가들과 협업을 해가는 이 ‘과정’ 자체가 커뮤니티 아트의 핵심이다.

차차 신흥상회 주변에 설치해놓은 낯선 구조물들이 주민들에게 생활의 일부로서 익숙해지고 마을갤러리에서 주민들의 그림 전시가 몇 순배 돌고 났을 때, 신흥마을 주민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어떤 이야기꽃이 피어날까? 그 이야기는 어떻게 기억되고 기록될까? 그리하여 어떤 터무늬가 피어날까? 그때쯤 이 ‘과정’ 전체를 공유할 수 있는 아카이브 전시를 기대해 봐도 좋겠다.

마을 담벼락 여기저기에 설치된 테라코타 작품들.

양진호 인문학교육연구소장

△전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팀장 △철학가, 번역가, 평론가, 기획자 등을 겸하면서 대학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