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 생존 주교 중 최고령인 윤공희 대주교(101세·세례명 빅토리노)는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에 있었다.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인 윤 대주교와 광주의 인연은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1950년 사제 서품을 받아 사제 생활을 이어가던 중 광주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윤 대주교는 금남로에 있었던 가톨릭 광주대교구에서 5·18 당시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의 만행을 직접 목격했다. 계엄군이 군홧발로 금남로를 활보하며 시민들에게 곤봉을 휘두르는 장면을 두 눈으로 봤다. 피로 물든 흰 와이셔츠를 입은 남성이 쓰러져 있는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전남도청에서 들려온 총소리도 잊을 수 없다. 윤 대주교는 5·18 민주화운동 이후 진상규명을 위해 군부독재 정권에 맞섰다. 매년 5월마다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미사를 집전했다. 가톨릭 광주대교구는 5·18 이후 구속자들의 구명, 석방, 진상규명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됐다. 유족들과 부상자들의 단골 집회장소였다. 이같은 윤 대주교의 열정에 감동한 지역민들은 그에게 ‘광주의 대부’,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 ‘5·18의 산 증인’이라고 불렀다.



군부독재 정권 맞선 ‘5·18 산 증인’

80년 광주를 체험한 윤 대주교는 45년이 지난 지난해 12월 3일 중무장한 계엄군이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본회의장으로 진입하는 장면을 언론을 통해 지켜봤다. 45년만에 또다시 계엄군을 목도한 윤 대주교를 지난달 26일 광주 가톨릭대학교 주교관 2층에서 만나 계엄과 5·18, 갈등 해소 방안 등에 대해 들어봤다.

윤 대주교는 매일 오전 5∼6시께 일어나 함께 생활하는 엔다 수녀와 함께 주교관 1층에서 미사를 드린다. 엔다 수녀는 2002년부터 윤 대주교 비서를 맡으면서 24시간 동거동락하고 있다. 미사를 본 뒤에는 2층 서재에서 기도와 독서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최근 그의 기도 제목은 ‘사람들이 자기를 성찰하고 죄를 뉘우치는 것, 세상의 평화가 이뤄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3일 미사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인 12월 4일 미사 분위기는 전날과 완전 달랐다. 전날 밤 윤석열 대통령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불법 비상계엄을 선포 했기 때문이다.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알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으셨냐’는 기자의 질문에 윤 대주교는 “놀랬죠”라며 말문을 잊지 못했다. 80년 5월 광주를 목격하고, 사제로 74년을 살아온 윤 대주교도 계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후 약 30초 가량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다. 기자도 다음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윤 대주교에게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 시간 담긴 의미는 굳이 듣지 않아도 소통이 가능했다.‘12·3 불법 비상계엄’이 80년 5월 광주와 오버랩 되면서 참혹했던 그 시절의 기억이 다시 소환된 것으로 보였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5·18 민주화운동으로 흘러갔다.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에 앞장선 윤 대주교는 80년 이후 광주·전남 시·도민들과 함께 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가족처럼, 때로는 동지처럼 5·18 진상규명을 외치는 현장에서 눈과 비, 바람을 맞았다.

윤 대주교가 기억하는 5·18의 첫 번째 감정은 ‘부끄러움’이다.

그는 “(80년 당시) 광주대교구가 금남로에 있었다. 그래서 (계엄군들의 만행을) 다 볼 수 있었다. 군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와이셔츠를 입고 있던 한 젊은이를 때렸다. 흰 와이셔츠가 피로 범벅이 됐다. 빨리 내려가 응급치료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겁이 나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사제는 비켜 가고, 원수 사이인 사마리아인이 도와준다. 내가 그 사제와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안 내려간 것이 마음의 가책, 강도를 만난 사람을 피해간 사제와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고 했다. ‘부끄러움’이란 감정은 윤 대주교를 5·18의 산 증인으로 이끌었다.

그는 “제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 그 어려움 속에서 시민들을 위해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면서, 나도 같이 이것저것 할 수 있은 일들을 해본 것이다”고 전했다.



“진실의 정의 위에서 살아야”

윤 대주교는 “진실의 정의 위에서 살아야 한다.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도 방법이 잘못되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5·18은 민족적 큰 시련인데, 우리가 이런 민족의 비극을 기억하고 진실을 알고, 모두가 평화스럽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독일의 경우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대를 계속 기억하고, 남기고, 뉘우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을 항상 세상 사람들에게 깨우쳐 준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훌륭하다.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고 했다.

전두환을 만나 사형수 사면을 받아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정권 최고 수장을 만나 정정당당하게 5·18 사형수 사면을 요구했다. 1981년 3월 대법원은 정동년, 배용주, 박노정 등 5·18 관련자 3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

그는 “전두환이 광주를 방문해 (지역 유지들과) 환담하면 나를 불렀다. 대법원에서 사형으로 최종 판결이 난 직후 사형수 가족들과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구명에 대해 논의했다”며 “내가 추기경에게 전두환을 만나보겠다고 얘기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이어 “청와대 군종신부가 연결해 줘 전두환과 만남이 성사됐다. 청와대에서 만나 ‘다 사면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는데 전두환이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다음날 사면 발표가 나왔다. 나중에 알게됐는데 허삼수가 전두환의 심경 변화를 이끌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윤 대주교는 종교인으로 5·18 수습위원회에 참여해 전남북 계엄분소장 소준열 장관에게 광주 시민들은 폭도가 아니라고 호소했다.

그는 “소준열 장관에 전화를 했다. 시민들을 폭도라고 부르지 마시오. 군인들이 처음부터 험악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 거니까. 그것부터 인정하고 일을 수습하려는 노력해야 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소 장군은 청문회에서 윤 대주교에 이런 통화를 한 사실을 인정했다.

윤 대주교에게 한국 사회 갈등을 치유할 해법을 묻자, “한 가족과 같은 민족의식, 서로를 신뢰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남북이 갈라져 있으니까 신뢰 의식은 더욱더 필요하다”고 했다.

남북 문제와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남북통일에 대해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전 정부에서) 남북 관계가 아주 좋게 대화가 이뤄졌다. 이런 게 잘 이어지고 발전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한국 사회 갈등 치유 해법은 신뢰

윤 대주교는 젊은 시절 경험한 북한 교회의 이야기를 정리한 책(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을 출간하기도 했다.

책 마지막에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하는 것밖에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썼다. 윤 대주교는 “남과 북이 하나 되는 날을 기대하며, 한마음이 될 수 있기를 빈다”고 했다.

새해를 맞은 광주시민과 전남도민들에게는 “우리는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신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속에 살고 있다. 사랑을 실천하는 그런 사회를 이루자”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데 윤 대주교는 웃옷을 챙겨 입고 바깥으로 나와 기자들을 배웅해줬다. 윤 대주교 옆에는 엔다 수녀와 동물 식구들도 함께했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만나 윤 대주교와 인연이 된 할아버지 애완견도 눈에 보였다. 마지막 악수를 청하고 떠나려는 기자에게 윤 대주교는 손을 흔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건강하세요” 대주교님.

서울=김현수 기자





윤공희 대주교는

1924년 평안남도 진남포시 용정리에서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출생 하루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다. 윤 대주교의 부모 모두 독실한 신자였다. 1949년 함경남도 덕원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북한의 가톨릭 탄압을 피해 남으로 내려왔다. 이후 1950년 현재 가톨릭대학인 서울 성신대학을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교황청으로 유학을 떠나 1957년 교황청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석사학위, 1960년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총무를 맡았으며 3년 뒤인 1963년 10월 7일 교황청으로부터 수원교구장에 임명된 데 이어, 같은 해 10월 20일 주교품을 받았다.

1973년 10월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돼 2000년 은퇴할 때까지 27년간 교구장을 맡아 광주와 인연을 이어갔다. 은퇴 이후엔 광주가톨릭대학교 주교관에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