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가족여행으로 싱가폴을 다녀왔다. 일 년 내내 덥거나 조금 덜 덥거나 하는 싱가폴은 런던이나 파리처럼 비가 자주 내린다고 한다. 번거롭지만 우리는 여행 내내 가방 속에 우산을 넣고 다녔다. 다행히 첫날과 둘째 날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무겁게 넣고 다닌 우산을 펴보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가져오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여행 삼일 째에 식물원을 가려고 나서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그것도 바람을 동반한 폭우였다. 우리는 비바람을 피해 일정을 변경했다. 다음 날로 예정된 미술관을 먼저 가기로 했다. 가족이 함께 미술관을 가는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 애들이 어렸을 적에는 방학과제를 핑계 삼아 서울로 곧잘 다녔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싱가폴 국립미술관은 노후 된 대법원과 시청 건물을 허물지 않고 리모델링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오래된 두 건물을 다리로 이어 하나의 미술관으로 재탄생시켰다고 하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미술관 주변의 이색 광경을 바라보며 다리를 건너가는 동안은 나도 작품의 일부가 되는 듯한 착각을 했다. 어깨가 으쓱했다. 우리가 입장권을 끊고 관람을 시작할 때는 넷이었는데 한 시간쯤 지났을까. 둘이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미술관을 오기 위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아쉬웠다. 나는 좋지만 다른 사람은 심드렁할 수 있으니 그러려니 해야지 별수 있나. 그나마 나와 둘째는 제법 코드가 맞아 한 작품이라도 놓칠 새라 꼼꼼히 둘러보았다. 몇 작품 앞에서는 서로 의견을 주고받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중 우리를 꽤 오랫동안 붙잡은 작품이 있어 소개한다.

인도네시아 작가 FX Harsono의 작품이다. 작품명은 "이 크래커가 진짜 권총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다. 분홍색 크래커로 만든 권총을 한쪽 벽 가득 쌓아 놓고, 그 앞에는 나무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펼쳐진 노트와 볼펜이 있다. 노트는 관람객이 감상 소감을 적어 넣는 것으로 방명록을 대신했다. 이 작가의 작품은 나무 책상과 관람객의 감상까지 포함된 것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이색적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글을 읽어 보았다. 감동과 함께 아찔함이 밀려왔다. 작품도 매우 인상적이었지만 관람객들이 쓴 문구도 그에 못지않았다. 나는 스마트 폰에 노트를 넘겨가며 내용 중 일부를 메모했다. 그 중 몇 편을 소개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어요.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할거야. 이것을 녹여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거야." 등 대체로 긍정적인 문구가 많았다. 물론 섬뜩한 문구도 있었다. 어떤 문구였을지 상상해 보시길.

전쟁 없는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세계인들의 염원임을 다시 확인했다. 나도 그 노트에 한글로 크게 썼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전쟁이 속히 종식되길 바란다고." 미술관을 관람하는 내내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예술작품의 힘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크고 작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을 보고 듣는 이들에게 커다란 울림과 함께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면서 말이다.

우리는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을 떠나봐야 집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우리는 그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하루는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의 한 달과 맞먹는다. 그만큼 여행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의미가 크다는 것 아니겠는가. 여행이라고 꼭 멀리 가야만 여행이 아니다. 며칠을 떠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작가는 가장 좋은 여행은 집 근처 공원으로 소풍가는 것이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저런 복잡한 일로 잠시 집을 떠나고 싶을 때는, 한 권의 책과 한 잔의 커피만 챙겨 들고 종일 소풍을 다녀오는 것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지만 가져간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애써 뭘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멍 때리다 집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은 가까운 미술관으로 가보는 것은 어떨까. 멋진 작품 앞에서 한동안 서 있는 나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을처럼 깊어진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