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을 모두 지운 감나무에 홍시가 매달려 있다. 추운 허공의 골목으로 붉음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제 몸에 불을 켜 길 잃은 새들과 여린 생명들을 불러들이는 걸까. 추위의 안쪽에서 둥글고 환하게 타오르는 불빛, 달달한 홍시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기나긴 떫음의 시간을 건너왔을 저 불빛. 그 홍시가 오후를 따스하고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우연히 만난 미용실 원장도 홍시처럼 따스한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지인이 맡겨 둔 물건을 찾기 위해 미용실에 들렀다. 원장은 번득이는 가윗날로 졸음과 하품에 섞인 어제를 뭉텅뭉텅 자르고 있었다. 어떤 손님은 이별의 아픔을 과장된 색으로 염색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고, 또 어떤 손님은 실업의 서러움에 가르마를 탄 후 들쭉날쭉한 불안을 잘라내고 있었다. 원장은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행운이 따를 거라며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물건을 챙겨 나가려는데 원장이 나를 불러세웠다. 점심시간이니 밥을 먹고 가라고 했다.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그녀는 내 팔을 잡아당기더니 미용실 안쪽 공간으로 끌고 갔다. 식탁에는 손님으로 보이는 서너 명이 식사하고 있었다. 원장은 점심시간에 미용실로 온 사람에게는 무조건 밥을 챙겨준다고 했다. 원장의 말 속에서 환하게 타오르는 어떤 따스한 불빛이 보였다. 저 불빛에 의지해 상처 입은 가슴과 허기진 마음들은 꽁꽁 언 몸을 녹였을 것이다. 아픔에 잠긴 그동안의 저녁을 몽땅 끄집어내어 저 불꽃에 곁불이라도 쬐어주면 젖은 마음이 다 마를 것 같았다. 원장이 고봉밥을 담아 주었다. 홍시처럼 봉긋하게 올라온 밥이었다.

원장은 죽음을 앞둔 자식을 하느님이 살려주어서 점심 봉사를 하게 되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자식 키우려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는데 지금은 자식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다. 원장의 말 속에서 우리가 추구한 어떤 욕심이 거품처럼 느껴졌다. 욕심은 우리를 유혹하는 장미향이 나게 해, 우리는 그 장미향 거품만 계속 만들면서 둥둥 떠다니는 거품 인생을 살았구나 싶었다. 거품에서 나는 장미향에 취해 장미의 언어로 눈뜨고 장미의 언어로 잠들면서, 내일은 욕심이라는 장미가 피어날 거라 믿으며 살았던 것 같았다. 원장은 삶과 죽음의 간극에서 슬픔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직립의 밤, 그 아우성의 시간을 기도로 견뎌냈을 것이다. 자식의 내일이 온기 가득한 삶의 안쪽으로 다시 들어서기를 간절히 바라며.

감나무에 내려앉은 까치가 홍시를 부리로 쪼아먹고 있다. 아니, 홍시라는 따스한 불꽃에 추위에 젖은 날개를 말리고 있다. 매서운 겨울을 날아오르느라 지친 나래짓을 벗고 불을 쬐고 있다. 원장이 건네준 고봉밥 같기도 하고 불꽃 같기도 한 홍시. 둥글게 불타오르는 저 붉음 속에는 미용실을 찾은 손님과 고단한 새의 날갯짓과 길 잃은 생명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자신의 언 몸을 녹인 풍경이 깃들어 있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흐리다. 감나무에 켜진 홍시라는 불빛이 가로등처럼 환하다. 어둠에 젖은 길과 쓸쓸한 저녁에게 곁을 내주려는 걸까. 까치가 홍시의 살점인 환한 불꽃을 입에 물고 날아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