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문을 닫고 나는 여수로 내려왔다. 상경한 지 17년 만이다. 2024년 12월이 빚더미에 짓눌린 낙향의 겨울로 기억될 줄은 미처 몰랐다.

서울 짐은 급한 대로 형 집에 부렸다. 이혼 후 혼자 사는 형은 기꺼이 작은 방을 내어 주었다. 나는 한동안 TV 노랫소리를 따라 흥얼거리는 형의 취기 어린 목소리를 벽 너머로 들으며 선잠을 잤다.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날이었다. 말수 없는 형이 불쑥 자전거를 디밀었다. 동네에 버려진 자전거를 수리해 온 것이었다. 그걸 타고 어디 어디를 가보라 했다. 모두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다. 나는 긴가민가했다. 여수는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아니다.

그날 오후, 형은 나를 진남시장으로 데려갔다. 아치형 간판이 달린 시장 입구 맞은편에는 속옷 전문 매장이 있었다. 거기서 형과 나는 방한용 속바지를 하나씩 골랐다. 형은 회색 나는 검은색을 집어 들었다. 귀마개와 장갑도 샀다. 자전거가 가르고 나아갈 차가운 겨울바람을 형은 염려했다.

속옷 매장을 나와 반찬 가게로 향했다. 좌우로 점포들을 거느린 시장 길은 뭍에서 난 것들을 씻어낸 담수(淡水)와 바다에서 난 것들이 달고 온 염수(鹽水)가 한데 섞이고 있었다. 담수와 염수가 만나는 길에서 누구는 썰고 누구는 굽고 누구는 외쳐댔다. 우리는 길의 끝에서 반찬 가게를 찾았다. 색 바랜 앞치마를 두른 주인 여자는 어딘가 닮은 두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검은 비닐봉지 가득 오징어채, 도라지무침, 멸치볶음이 만 원 단위로 채워졌다. 하나같이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을 것들이었다.

서울에 없는 일자리는 여수에도 없었다. 일 없는 나는 자전거를 타고 대문 밖을 나섰다. 형이 말한 그 어디 어디를 가볼 참이었다. 빨간 몸체에 까만 일자형 운전대의 자전거는 멀끔한 녀석이었다. 10단이 넘는 기어에 지퍼식 보관함까지 장착돼 있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웅천(熊川)이었다. 운전대 정중앙에 세로로 달린 보관함에는 생수병을 넣었다. 생수병을 한번 꺼내 들기도 전에 바다가 보였다. 웅천으로 건네주는 선소대교(船所大橋)는 웅장했고 장도(長島/獐島)로 건네주는 진섬다리는 신비로웠다.

진섬다리는 하루 두 번 일출과 일몰 어름에 서너 시간씩 바다에 잠긴다. 아침나절에 다리를 삼킨 바닷물이 일몰이 가까워 오도록 바닥에 흥건했다. 흥건한 바닷물에 자전거 바퀴가 밀리고 바닥에 난 홈들을 타고 넘느라 덜컹거렸다. 해질녘 자전거 페달 아래 찰박이는 해수(海水) 소리는 저 세상의 되울림 소리 같았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만성리(萬聖里)였다. 실은 만성리 검은 모래밭을 보러 갔다가 다른 곳에 길눈이 트였다. 웅천 길과 달리 만성리는 잘 닦인 자전거 전용 도로 끝에 있었다. 건널목마다 신호에 걸려 지체하거나 급경사에 힘을 뺄 일이 없었다. 오르막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어서 딱 한 구간만큼은 고저가 분명했다.

다리 밑으로 난 그 고저 분명한 구간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오림(吾林) 터널이 나온다. 오림 터널을 보기 전까지 지금의 자전거 도로가 옛 기찻길이었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다. 터널 내부 양쪽 벽면을 장식한 갤러리 작품들에 시선을 빼앗겨서는 더더욱 알 수 없다. 방공호를 연상시키는 콘크리트식 천장과 벽돌식 벽면의 매끄럽지 못한 이음새를 보고 나서야 깨닫는다.

가보면 안다. 기관사만이 알아보았을 벽면에 세로로 붙은 네 자릿수의 표식이 아니더라도 알게 된다. 1937년 3월에 전 구간이 개통된 전라선 기차가 오가던 곳이라는 사료(史料)를 굳이 들춰볼 필요도 없다. 이건 일제 때 지어진 구조물이다.

나를 멈춰 세운 것은 벽돌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냉기였다. 틈새마다 서려 있을 조선인들의 한숨이었다. 그들의 한숨이 터널을 뚫고 길을 다졌다. 나는 끝나지 않는 터널 속에서 그들의 한숨 속에 한없이 젖어들고 싶었다.

터널을 다녀온 후로 바다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형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 형은 바다가 아니라 버려진 자전거가 달리는 길을 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버려진 자전거가 폐선로를 달릴 때 기차는 오지 않아도 좋은 것이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오림 터널은 나의 가장 깊고 넓은 바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