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핀 능소화 여섯 송이를 선물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능소화가 그려진 그림 한 점을 선물받은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낮에는 화사하게 핀 능소화가 분명했는데 밤에는 불빛으로 인해서인지 고개를 살짝 외 틀고 있는 소녀의 모습으로 보인다. 조명에 따라 달라지는 능소화를 통해 혼란의 시기에 즐거움을 얻고 있어 감사하다. 그 감사함에 빠져들다 보면 밀려오는 안온함으로 나른해진다. 잠시 딴 세계로 건너온 듯한 착각 속에 빠지기도 한다. 요즘 내가 그림을 보는 시간이 잦아지는 것을 보니, 그림 속 무릉도원으로 잠시 다녀오고 싶은 모양이다.

그림을 좋아하는 나는 화가들과 인연이 많다. 내가 처음 그림을 가까이 한 계기는 스무 살에 만나 함께 공부했던 친구 덕이 아닌가 싶다. 그 친구는 서양화를 전공했다. 우리가 만날 때도 가끔은 커다란 검정 화구통을 메고 나와 제법 멋져 보였다. 아니 그때는 나의 처지와는 너무 다른 환경의 친구가 호사스럽게 느껴졌다. 지금, 그 친구는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조각하는 남편을 뒤늦게 만나 그림처럼 살고 있다. 또 다른 인연은 광주 K 대학의 교수님이다. 그는 조각가뿐 아니라 화가로도 유명하다. 그분으로 인하여 많은 화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고 그림을 감상할 때는 어떤 태도여야 하는지도 배웠다. 마음으로 존경하는 분이다. 또 한 분은 나이는 크게 차이나지만 벗처럼 지내는 늦깎이 화가다. 지천명이 넘어 성악과 그림을 공부하다가 지금은 개인 화실에서 수강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분이다. 이 세 사람 말고도 가깝게 또는 멀게 많이 있지만, 이들이 특히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 싶다.

최근에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시회에 다녀왔다. 나는 이번 전시회를 무척 기대하고 있었던 터라 오픈런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허나, 아쉽게도 다음날 갔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띠를 이루고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참 오랜만이라 낯설었다. 많은 인파를 보니, 8년 전 한겨울 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견주고 광화문을 행진했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그것도 하이힐을 신고 말이다. 어쨌든 한적한 광주에서 올라온 내가 고흐의 그림보다 먼저 사람 구경하고 있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두 시간 넘게 기다리고 들어간 전시장이었지만 아쉬움이 컸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녀야 했다. 눈길이 가는 작품 앞에서 마음껏 감상할 수 없었다. 상황을 감지한 나는 입장 전에 미리 동선을 정했다. 뒤에서부터 봐야겠다고. 다행히 나의 계획이 적중했다. 그나마 출구 쪽은 조금 한산했다. 나는 차분하고 깊숙이 능소화의 소녀에게 빠져들 듯 고흐에게 빠져들었다.

몇 년 전 파리에 갔을 때 오베르에 가지 못했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전시된 그림 한 점 한 점을 가슴으로 감상했다. 그가 마지막 생애를 보낸 정신병원에서 그린 그림 앞에서는 그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나 안타까운 그의 삶이 통째로 내게 전달된 듯했다. 그가 태어난 날이 그 전해에 그의 형이 죽은 날이었다니, 그 형을 잊지 못해 그의 이름을 그대로 고흐에게 주었던 어머니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망했던 고흐는 많은 여성들에게도 버림을 받았다고 한다. 이 얼마나 비통한 운명인가. 서른일곱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간 그가 우리에게 남긴 작품들을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불멸의 고흐 전은 3월 16일까지 계속된다.

전시회를 다녀온 후로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다시 깨달았다. 옛 어른들은 아니 멀리 갈 필요 없이 우리 아버지 세대만 하더라도 다음 날 아침에 길 가다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하는 인사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였다. 밤새 무슨 일이 있겠냐 싶어 그렇게 물었을 리는 없고 그저 별일 없이 오늘도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되어 반갑다는 뜻이었으리라 짐작된다. 2025년의 벽두에 다시 묻고 싶다. 당신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